“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오늘 복음에는 묘한 대조와 긴장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선, 주님과 바리사이들 사이에 대조와 긴장이 있는데,
주님은 살리려 하시고 바리사이들은 그런 주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감정에도 두 가지 대조되는 감정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에 대한 분노와 슬픔의 두 감정입니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셨다.”
그런데 주님도 분노의 감정을 가지셨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노하셨구나 하면서 안심을 하십니까?
주님의 분노는 우리의 분노와는 다를 거라고 생각하며 반성을 하십니까?
제 생각에, 아니 여러분의 생각에도
주님의 분노는 우리의 분노와 다를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분노를 하고, 해야 할 분노는 하지 않는데 비해,
주님께서는 마땅히 해야 할 분노만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마땅히 해야 할 분노입니까?
그것은 내 뜻대로 안 될 때 생기는 우리의 불만족의 분노와 달리
하느님의 뜻대로 창조된 생명을 파괴하는 죄악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금 우리나라에 오시면 마찬가지로 분노하실 것이고,
우리들에게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자기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으려 하면서 남은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에게,
24명이나 죽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쌍용차 관계자들에게,
기업은 살리면서 직원과 그 가족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기업가들에게,
주님께서는 분명 대단히 분노하실 거고, 단호하게 물으실 것입니다.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러면 이들은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는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처럼 아무 소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침묵은 어떤 침묵입니까?
유구무언, 입이 열 개로라도 할 말이 없다는 그런 반성의 침묵입니까?
이 침묵은 묵살黙殺의 침묵입니다.
묵살이라는 말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침묵으로 죽이는 것이 묵살이지요.
죽겠다는 비명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
입만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눈, 코, 귀와 마음까지 다 닫습니다.
그리고 오늘 바리사이들이 아무 소리하지 않고 나가서
주님을 죽일 모의를 헤로데 당원들과 하듯이
이들은 생명의 소리에 대해서는 묵살을 하고 죽이려는 음모만 꾸밉니다.
이것이 그들의 완고함입니다.
자기 배 불리는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까딱하지 않는,
수없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까딱치 않는 완고함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슬퍼하십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셨다.”
주님의 분노가 슬픔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슬픔은 사랑의 슬픔이잖습니까?
비록 불순물이 섞인 사랑일지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슬픕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바뀌기를 바라시며 질문하셨지만
그들의 마음이 너무도 완고하여 침묵으로 묵살하고
오히려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니 슬플 수밖에 없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도 살리려는 당신 사랑이
이렇게 끝나는 것에서 오는 서글픔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