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교리에서는 세례를 죄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다시 태어남이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틀림이 없는 말씀이고, 맞는 말씀이지만 풀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그리스도교, 그중에서도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까?
만일 그런 것이라면 성사적으로 적법하게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법적이고 형식적입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나쁜 짓을 밥 먹듯이 한다면
어찌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사람,
곧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어야겠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적어도 나쁜 짓을 하지 말아야 하고,
죄를 지었다면 그 죄를 씻는 세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뉘우치고 나쁜 짓을 그만 두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데 필요조건일지언정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진정한 아드님이신 주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주님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이어 성부께서 다음과 같이 선언을 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은 이처럼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가까스로 죄를 짓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죄를 씻는 물의 세례는 종종 자기만족으로 그치기 쉽습니다.
그것은 행주나 걸레가 되지 않고 깨끗한 옷으로 있고자 함과 같고,
땀을 흘리고 난 뒤에 씻지 않으면 꿉꿉하고 찝찝하여
반드시 목욕을 해야만 하는 것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깨끗한 것인지는 몰라도 사랑은 아닌 것이지요.
그러나 불의 세례를 받은 하느님의 아들은 사랑을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르단강에 들어가심이 당신을 씻기 위함이 아니라
요르단강물을 깨끗하게 하고,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행주와 걸레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더러워지는 것을 마다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요르단강에 들어가신 주님은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사랑을 완성하십니다.
섬김을 받으러오지 않고 섬기러왔다고 하신 주님은
당신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씻어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 사랑의 세례를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