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물든 가을 하늘 아래
1. 가을 들꽃의 노래
돌담 모퉁이 마른 흙바람 속에
아무도 이름표를 달아주지 않아도
우리는 높고 시린 하늘 아래
가장 맑은 목소리로 피어납니다.
여름내 초록 그늘 속에 숨죽였던 숨결,
서늘한 갈바람이 여윈 대를 스칠 때면
하얗고 보랏빛 작은 꽃잎 끝을 모아
낮게 흔들리며 건네는 노래.
"지나가는 발걸음이여, 잠시 머물러 보아요.
화려했던 봄날의 찬가는 아닐지라도
기울어가는 볕 한 줌, 새벽이슬 한 방울 머금고
우리는 온 힘을 다해 깊어가고 있습니다."
눈부신 노을빛을 꽃술마다 엮어
들판 가득 잔잔한 파도로 번질 때,
비워내야 비로소 눈이 부신 계절의 비밀을
휘어지는 줄기마다 조용히 새깁니다.
머지않아 서리 내리고 마른 잎 질지라도
우리의 노래가 서럽지 않은 것은,
차가워진 세상의 발치에 엎드려
가장 다정하고 소박한 빛깔로
가을의 마지막을 따스하게 안아주었기 때문입니다.
2. 금목서 향기로 여는 아침
어둠이 걷히는 뜨락,
창문 틈으로 향기 한 줄기 스며듭니다.
꽃은 아직 보이지 않는데
가을은 벌써 잠든 숨을 깨웁니다.
초록 잎 사이 작고 노란 꽃들이
밤새 품었던 향기를 찬 공기에 풀어놓습니다.
신발을 꿰어 신고 마당에 서면
이슬 맺힌 금빛 꽃송이들,
그 작은 것들이 건네는 향기에
오래 모난 마음도 조금씩 부드러워집니다.
가슴 깊이 숨을 들입니다.
살아온 날의 쓴맛 곁으로
그윽한 향기가 번집니다.
금목서 작은 꽃송이 위로
가을비 가만히 내려앉으면
물방울 방울방울 매달고 미소 띤 국화의 얼굴.
붉고 노란 물감 곱게 찍어
만산(萬山)에 색조화장을 하시는 하느님,
오늘도 곱게 걸어가라고,
아직 피어날 날이 남아 있다고.
작은 꽃들이 아침을 열어줍니다.
3. 은빛으로 익어가는 가을
황매산 기슭에 기대어 핀
구절초의 환한 얼굴을 지나
가쁜 숨 고르고 또 고르며
천천히 정상을 오른다.
검은 머리에 슬며시 내리던 서리가
어느덧 머리칼을 온통 은빛으로 물들였다.
모진 비바람과 뜨거운 여름을 건너
내게도 이토록 깊은 가을이 왔다.
눈앞에 펼쳐진 은빛 억새의 바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서로의 어깨를 쓸며 일렁이는 물결.
그 낮은 수런거림을 품고
붉은 노을이 산 아래로 번진다.
더디게 옮기는 걸음마다
오래된 무릎이 지나온 길을 되짚는다.
뼈마디에 옹이처럼 박힌 서러움도
끝내 내려놓지 못한 그리움도
오늘은 억새 사이에 풀어놓는다.
바람은 어느 사연 하나 재촉하지 않고
가만가만 먼 능선으로 데려간다.
젊은 날 푸르게 타오르던 불꽃이
이제 가슴 깊은 곳에서
온유한 온기로 익어간다.
숨을 고르느라 멈춘 자리마다
미처 보지 못했던 산하가 열린다.
은빛 억새와 붉은 낙조 사이,
백발을 흔드는 바람 속에 오래 서 있다.
저무는 햇살 한 줌이
내 머리 위에도 억새 위에도
가만히 머문다.
4. 그리움에 물든 가을 하늘 아래
바람이 먼저 길을 비우면
가을 하늘은 손닿을 수 없을 만큼 높아져
비워낸 자리에 네 이름을 한 자씩 새긴다.
눈이 시리도록 투명한 쪽빛 위로
스치기만 해도 흩어질 듯한 노을이 번지면,
발밑에 버석이는 마른 잎새 소리마저
우리가 미처 다 건네지 못한 말들의 부스러기 같다.
비워내어 아름다운 계절이라 하지만
내 가슴은 아직 비우지 못해,
너라는 그리움으로 물든 하늘 아래 오래도록 서성인다.
부르지 못한 이름 하나 품고
잎을 내려놓은 나무 아래 나는 오래 서 있다.
빈 가지 사이로 저녁빛이 스미고
아직 비우지 못한 네 이름이
내 안에서 붉어진다.
아! 태초부터 숨겨진 그 이름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