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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그리스도와의 우정 1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는 삶

 

그리스도와의 우정은 그분에 대하여 많이 알고 그분을 자주 생각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그분과 결합하여 그분이 사랑하신 방식으로 사랑하고, 그분이 내려가신 길을 따라 내려가며, 마침내 우리의 몸과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이 다시 살아나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데서 완성됩니다. 프란치스칸 기도의 길에서 우정은 하나의 신심이나 특별한 기도 방법이 아니라 삶 전체를 그리스도에게 내어놓는 관계이며,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마침내 우리가 사랑하는 분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보나벤투라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향하여 온몸을 열어놓으신 친구의 모습으로 바라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입 맞추시려고 머리를 숙이시고, 우리를 끌어안으시려고 두 팔을 펼치시며,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손을 여시고,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시려고 몸을 내미시며, 우리가 당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옆구리까지 열어놓으십니다. 십자가는 멀리 계신 하느님의 형상이 아니라 우리와 친구가 되기 위하여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우정은 우리가 먼저 그분을 찾아간 결과라기보다 우리를 향하여 이미 온몸을 열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느님의 갈망에 대한 응답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갈망하기 이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갈망하셨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기를 결심하기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우정의 가시적인 표지이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맹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한 우리의 기술이나 노력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사랑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랑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클라라는 이 신비를 십자가라는 거울의 상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녀가 아녜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며 관상하라고 권고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그림처럼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분 안으로 들어가고, 그분의 사랑을 맛보고, 그분이 사랑하신 방식에 자신을 내어맡기며, 마침내 자신이 바라보는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관상은 바라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변형으로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라는 거울 앞에 서면 우리는 하느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보게 됩니다. 그 거울에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가 드러나는 동시에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진실도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이시며, 인간은 바로 그 사랑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깊이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통을 바라보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떤 존재가 되도록 창조되었는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움켜쥐고 보호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선물할 때 비로소 자기 존재의 진실에 도달하는 존재입니다.

 

클라라에게 십자가라는 거울의 테두리는 가난이며, 그 표면은 겸손이고, 그 가장 깊은 중심은 사랑입니다. 말구유에서 시작된 가난, 나자렛과 갈릴래아의 일상에서 드러난 겸손, 그리고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 자기 내어줌의 사랑이 하나의 길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가난과 겸손과 사랑이라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그리스도에 대해 감탄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내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매우 아름답고도 놀라운 관계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주님의 영을 받아 그 거룩한 활동을 행하고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정배이며 형제이고 어머니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 세 표현은 단순한 경건한 호칭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결합된 삶의 전체 여정을 보여줍니다. 정배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결합하는 사람이며, 형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뜻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어머니는 자신이 받아들인 그리스도를 거룩한 행실과 관계를 통하여 세상에 낳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정배와 형제와 어머니는 서로 분리된 세 가지 신분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움직이는 세 방향입니다. 우리는 먼저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와 결합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뜻을 살아가고, 마침내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줌으로써 세상 안에 그리스도를 낳습니다. 받아들임에서 결합으로, 결합에서 순종으로, 순종에서 자기 내어줌으로, 자기 내어줌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이 프란치스칸 관계성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정배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사랑받는 것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복음의 시작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입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먼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따라서 정배의 첫 번째 자세는 성취가 아니라 수용이고, 소유가 아니라 가난이며, 자기 증명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받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위로를 경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나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 오래 머물면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붙잡고 살아가는지가 드러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가 옳아야 한다는 집착,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바꾸고 싶은 통제 욕구,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자기 가치를 확인하려는 마음,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방어벽과 체면이 드러납니다. 십자가의 거울은 우리가 감추고 싶은 이러한 거짓 자아를 비춥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우정은 자기 인식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깊이 알아갈수록 우리는 자기 자신을 더 진실하게 보게 되고, 자신의 가난을 알수록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나환자를 끌어안았던 사건은 바로 이 신비를 보여줍니다. 그가 나환자의 손에 입을 맞추었을 때 그는 단순히 자신 밖에 있는 한 사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기 안에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가난과 약함과 두려움까지 함께 끌어안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안의 나환자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밖에 있는 나환자도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유난히 힘들어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 안에서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만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고집 센 사람에게 지나치게 화가 나는 것은 내 안의 고집을 건드리기 때문일 수 있고, 인정받으려는 사람을 못 견디는 것은 내 안에도 같은 갈망이 있기 때문일 수 있으며, 통제적인 사람에게 강하게 반응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통제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는 때로 우리의 일상적인 거울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거울이라면, 형제는 내가 아직 그리스도처럼 변화되지 못한 부분을 보여주는 가까운 거울입니다.

 

그러므로 관계의 갈등은 언제나 제거해야 할 장애물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인식으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이 왜 저러는가?”라는 질문에서 나는 왜 저 사람에게 이렇게 흔들리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갈 때 관계는 영적 여정이 됩니다. 상대를 바꾸는 데 몰두하던 시선이 자기 내면으로 돌아오고,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작음과 가난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난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다른 사람의 가난도 조금씩 품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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