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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어주는 사랑에 참여하는 삶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요한복음의 이 말씀은 복음 전체를 한 문장 안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시작은 인간이 하느님을 찾아 올라가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호의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는 말씀의 중심에는 사랑과 내어줌이 있습니다. 사랑하셨기에 내어주셨고, 내어주심으로써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서로를 향하여 존재하시며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친교이십니다. 성부께서는 모든 것을 성자께 내어주시고, 성자께서는 모든 것을 성부께 돌려드리며, 성령께서는 그 사랑의 친교 안에서 우리를 하느님의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가장 깊은 신비에는 움켜쥠이 아니라 내어줌이 있고, 지배가 아니라 친교가 있으며, 자기중심성이 아니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해 주셨다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우리를 삼위일체 안에서 영원히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의 친교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랑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육화는 바로 그 사랑이 인간의 역사와 관계 안으로 들어온 사건입니다. 성자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인간이 되셨고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먹고 걸으며 병든 이들을 만지고, 죄인들과 식탁에 앉고, 버림받은 이들의 친구가 되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이 어디까지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기에 자신을 지키지 않으셨고, 사랑하셨기에 낮아지셨으며, 사랑하셨기에 당신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내어줌은 자기 파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 가장 자유로운 자기 증여였습니다. 여기에 프란치스칸 영성의 가난과 겸손이 자리합니다. 가난은 단순히 가진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더 깊은 가난은 나 자신까지도 내 소유라고 움켜쥐지 않는 자유입니다. 내가 가진 능력과 지위와 생각과 경험과 명예를 나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 역시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내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욕망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가 한 걸음 물러섬으로써 다른 사람이 존재할 자리를 마련해 주고, 내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형제의 이야기가 들리게 하며, 내가 빛나려 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이 빛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가난과 겸손은 결국 하나의 방향을 향합니다. 나를 움켜쥐지 않고 선물로 내어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께서 성자께 자신을 내어주신다고 해서 성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성자께서 성부께 자신을 내어드린다고 해서 성자의 고유성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각 위격의 고유성이 온전히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은 내가 없어지고 상대만 남는 관계가 아닙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살아나는 관계입니다. 더 깊게 말하면 내가 너를 살게 함으로써 나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참된 나로 살아나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적 친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내 뜻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일을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품어주는 것이며,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허용하는 것이고, 붙잡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놓아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한복음 316절은 우리에게 단순히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나 자신을 내어주었는데, 너는 오늘 누구에게 너 자신을 내어주고 있는가?” 시간을 내어주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생각을 조금도 내려놓지 않으면서 상대를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자리와 권한은 움켜쥐면서 형제성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상대가 나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면서 정작 나는 그 사람의 고유함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믿음의 의미도 새롭게 드러납니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내어주십니다. 성자께서는 성부께 자신을 내어드리며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시고 우리를 그 사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다시 형제에게 자신을 선물합니다. 형제에게서 받은 사랑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고, 마침내 인간을 넘어 모든 피조물을 향하여 넓어집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적 사랑의 운동입니다. 사랑은 소유하지 않고 흐릅니다. 은총도 머물지 않고 흐릅니다. 용서도 흘러갑니다. 자비도 흘러갑니다. 내가 받은 것은 나에게서 멈추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 흘러가도록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기도 또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시간만이 아닙니다. 기도는 내가 움켜쥐고 있는 나 자신을 조금씩 내려놓고 삼위일체의 자기 내어주는 사랑의 리듬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기도 안에서 나는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나를 내어드립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내어드릴수록 역설적으로 하느님 안에서 참된 나 자신을 다시 받습니다.

 

공동체 역시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부딪히고 상처받고 기다리고 용서하면서 나는 이 형제에게 어떻게 선물이 될 것인가?”를 배우는 장소입니다. 바로 그 관계의 현장에서 우리의 신앙이 드러납니다. 내가 얼마나 오래 기도했는가보다 기도를 마치고 형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중요하고,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가보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자리를 내어주는지가 중요하며, 내가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는가보다 그 봉사 안에서 나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이 얼마나 작아졌는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프란치스칸의 가난과 겸손과 형제성과 단순성은 서로 떨어져 있는 덕목들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의 신비를 향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기 내어주는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가난은 나를 움켜쥐지 않는 것이고, 겸손은 내가 중심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형제성은 그 비워진 자리에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단순성은 그 관계 안에서 더 이상 자신을 포장하거나 증명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열매가 기쁨입니다.

 

내가 빛나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빛나는 것을 보며 기뻐할 수 있고, 내가 인정받아야 평안한 것이 아니라 형제가 인정받는 것을 함께 기뻐하며,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으며 기다릴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사람에서 이미 사랑받고 있음을 믿는 사람으로, 사랑을 얻으려는 사람에서 받은 사랑을 내어주는 사람으로, 무엇인가를 내어주는 사람에서 마침내 자기 존재 자체가 선물이 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어쩌면 이것이 프란치스칸 영적 여정의 깊은 목적일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서 기도가 된 사람으로, 사랑을 말하는 사람에서 사랑이 된 사람으로, 형제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에서 누군가에게 형제가 되어주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사랑의 크기를 설명하는 말씀인 동시에 우리를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하셨으니 우리도 서로에게 선물이 되라는 초대입니다. 그리하여 나와 너 사이에서 움켜쥠이 사라지고 내어줌이 시작될 때, 경쟁이 사라지고 함께 기뻐함이 시작될 때, 판단이 멈추고 자비가 흐르기 시작할 때, 통제가 사라지고 기다림이 시작될 때, 바로 그 관계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목적은 단지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하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사랑 안으로 끌어들여 당신처럼 사랑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부께서 내어주시고, 성자께서 자신을 비우시며, 성령께서 그 사랑을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게 하시는 그 영원한 사랑의 친교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시어, 우리의 가난한 일상의 관계 안에서도 그 사랑이 계속 육화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가장 깊은 신앙의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그 사랑을 받아 오늘 누구에게 선물이 되고 있는가?” 그 질문을 살아가는 순간 우리의 일상은 삼위일체의 사랑이 머무는 자리가 되고, 우리의 관계는 복음이 육화되는 자리가 되며, 우리의 작은 내어줌은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에 참여하는 기도가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을 받습니다. 사랑 안에 머뭅니다. 사랑을 내어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삶 자체가 사랑이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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