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걸어오면
가을이 걸어오면
하늘은 가장 맑은 빛을 풀어
산과 들의 이마를 짚습니다.
빛이 머문 자리마다
나무는 제 안의 빛깔로 깊어지고
들녘은 익어가는 침묵으로
하늘을 받아냅니다.
그 빛은 어느새
내 마음에도 내려와
오래 감추어 둔 그늘까지
조용히 비춥니다.
아름다운 것은
왜 이토록 슬픈지,
가득 물든 세상 앞에서
나는 오히려
내 안의 가난을 봅니다.
붙잡은 것 많았으나
정작 내 것이라 부를 것은 없고,
채우며 살아왔으나
마지막 남은 것은
빈 가슴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제야 알겠습니다.
비어 있음은
당신이 오실 자리였고,
가난은
은총이 머무는
가장 깊은 그릇이었음을.
나무는 잎을 놓으며
하늘에 가까워지고,
들풀은 자신을 낮추어
빛을 온몸으로 통과시킵니다.
나도 그렇게
당신의 빛을 가리지 않는
가난한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받은 사랑을 붙잡지 않고
흘려보내며,
내려놓을수록 맑아지고
낮아질수록 깊어져,
마침내
내 삶 하나가
당신을 비추는
작은 찬미가 되기를.
가을이 깊어갑니다.
나무는 비워지고
하늘은 더 넓어집니다.
그리고 나도
조용히 두 손을 폅니다.
가진 것 없어
비로소 모든 것을 받는,
그 가난한 자리에서
눈물처럼 맑은 한마디가
가슴 깊이 물듭니다.
찬미받으소서, 나의 주님.
당신으로 가득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잎씩
나를 내려놓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