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다섯 번째 이야기
공동체는 일방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은총의 통로가 되는 관계입니다. 내가 형제에게 빵을 건넬 때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그를 먹이시고, 내가 지쳐 형제에게 위로받을 때 하느님께서 그를 통하여 나를 품으십니다. 이렇게 형제성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을 반영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서로를 소유하지 않고 온전히 내어주시며,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기뻐하십니다. 한 위격이 다른 위격을 지배하지 않고, 사랑의 흐름 안에서 서로 안에 머무르십니다.
프란치스칸 형제성은 이 삼위일체적 사랑이 인간관계 안에서 육화되는 방식입니다. 자신을 움켜쥐지 않고 내어주며, 다른 이를 자신 안에 받아들이되 소유하지 않고, 서로의 고유함을 존중하면서 하나를 이루는 삶입니다. 형제성 안에서는 일치가 획일성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과 성격과 방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일치는 서로 다름에도 사랑 안에서 관계를 끊지 않는 것입니다. 삼위일체께서 세 위격의 고유함을 잃지 않으면서 하나이시듯, 공동체도 각자의 고유함을 존중하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다름을 없애려 할수록 공동체는 가난해집니다. 다양한 목소리가 사라지고 한 사람의 생각만 남을 때 외적으로는 조용할 수 있지만 생명은 메말라갑니다. 형제성은 다른 의견을 위협으로 느끼지 않고 공동체를 더 깊은 진실로 이끄는 가능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청이 필요합니다. 특히 말하기 어려운 사람, 힘이 적은 사람, 다수의 의견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공동체의 결정은 목소리가 큰 사람의 뜻이 아니라 가장 작은 사람의 존엄까지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권위도 형제성 안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복음적 권위는 위에서 명령하는 힘이 아니라 아래에서 형제들의 발을 씻는 섬김입니다. 공동체의 책임자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사람이 아니라 각 형제 안에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 자라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형제들의 목소리를 모아 함께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입니다. 권위는 사람을 통제하는 힘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듯, 참된 권위는 낮은 자리에서 공동체를 받칩니다.
형제성 안에서 순명도 맹목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순명은 함께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공동체의 필요를 들으며, 가장 약한 형제의 신음을 듣는 것입니다. 책임자는 형제들의 말을 듣고, 형제들은 공동선을 위하여 자신의 뜻을 내려놓으며, 모두가 함께 성령께서 이끄시는 방향을 식별합니다. 순명은 자기 생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공동체 안에 기꺼이 내어놓고, 더 큰 선을 발견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유입니다. 나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관계를 끊지 않고, 공동체의 결정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 보려는 신뢰입니다.
그러나 순명이라는 이름으로 한 사람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람을 파괴하지 않으며, 복음적 권위는 두려움과 침묵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형제성은 약한 사람도 안전하게 자신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누군가 자신의 아픔과 부당함을 말했을 때 공동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그 목소리를 덮는다면, 우리는 형제보다 제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거룩함은 잘못이 없다는 데 있지 않고, 잘못을 진실하게 인정하고 피해 입은 사람의 존엄을 회복하며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변화하는 데 있습니다.
형제성은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때로 공동체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무너뜨리지만, 거짓 위에 세워진 평화보다 진실을 통하여 다시 세워지는 관계가 더 복음적입니다. 상처를 말하는 사람을 문제로 여기지 않고, 그의 목소리 안에서 공동체를 회심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다시 형제성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완벽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서로의 불완전함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는 공동체가 아니라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나는 공동체, 갈등이 없는 공동체가 아니라 갈등 속에서도 대화와 용서를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형제성은 매일 선택해야 합니다. 아침에 마주친 형제에게 따뜻하게 인사하는 것, 식탁에서 말없이 앉아 있는 형제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 아픈 형제를 위하여 자신의 계획을 바꾸는 것, 누군가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감사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형제성은 거창한 선언보다 일상의 작은 몸짓 안에서 드러납니다. 문을 조용히 닫아 주는 배려, 늦게 오는 형제를 기다려 주는 인내, 실수한 이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게 하지 않는 신중함, 피곤한 형제의 일을 말없이 나누어 맡는 섬김, 다른 사람이 말할 수 있도록 자신의 말을 줄이는 절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는 충실함이 포르치운쿨라를 다시 세우는 돌입니다.
공동체는 거대한 사건으로 무너지기보다 작은 무관심이 쌓일 때 무너집니다. 인사를 하지 않고, 상대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기며,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아픔을 알아도 모른 척할 때 돌과 돌 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반대로 공동체는 작고 반복되는 사랑으로 세워집니다. 한 번 더 이름을 불러 주고, 한 번 더 기다리며, 한마디 덜 판단하고, 한마디 더 감사할 때 무너진 틈이 메워집니다. 형제성은 특별한 감동이 아니라 매일의 충실함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위한 도구로 자신을 내어주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도구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타인에게 이용당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통하여 형제에게 흘러가도록 자유롭게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입이 형제를 비난하는 도구가 아니라 위로하는 도구가 되고, 나의 귀가 소문을 듣는 도구가 아니라 그의 진실을 경청하는 도구가 되며, 나의 손이 지배하는 도구가 아니라 상처를 씻는 도구가 되고, 나의 발이 형제를 피하는 데 쓰이지 않고 외로운 이를 찾아가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도구는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를 듣고 자신을 맡깁니다. 때로는 말해야 하고 때로는 침묵해야 하며, 때로는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때로는 형제에게 필요한 거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참된 섬김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입니다. 나의 선의를 강요하지 않고, 그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나의 선행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