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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다시 복음으로, 다시 형제성으로, 다시 세상 속으로

선종 팔백 년은 한 사람의 죽음을 기념하는 시간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복음의 생명이 다시 우리를 부르는 시간입니다. 팔백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세상은 수없이 변하였고, 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하였으며,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지만, 인간의 가장 깊은 갈증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받고 싶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싶으며, 누구에게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품을 그리워합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다시 우리 앞에 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사상을 남긴 사람이 아니라, 인간 영혼이 가장 오래전부터 잊고 살았던 복음의 첫 언어를 다시 들려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먼저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우리를 붙잡으시는 하느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기 전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으셨고,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먼저 사랑하셨으며, 우리가 용서를 청하기 전에 이미 용서를 준비하고 계셨다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성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하여 증언한 기쁜 소식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두려운 심판자가 아니라 끝없이 자신을 낮추어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사랑으로 만났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누더기 옷을 입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빵 한 조각을 나누는 형제 안에서, 나환자를 끌어안는 떨리는 순간 안에서 그는 하느님이 먼저 자기에게 다가오셨음을 보았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결핍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가난은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자유였습니다. 그의 겸손은 자신을 비하하는 태도가 아니라 사랑받고 있다는 절대적인 안전감에서 흘러나오는 평화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고, 누구보다 높아지려 하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움켜쥐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움켜쥘 때 사라지고 내어줄 때 흘러간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온몸으로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도구란 자신의 뜻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의 뜻이 가장 자유롭게 흘러갈 수 있도록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는 존재입니다. 도구적 존재란 자유를 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자유를 선물로 바친 사람입니다. "주님, 저를 당신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그의 기도는 자신을 지우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이 자신을 통하여 세상으로 흘러가게 해 달라는 가장 아름다운 자유의 고백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신비주의의 가장 깊은 자리와 만납니다. 모든 신비주의자는 한결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은 인간 영혼과 친밀해지기를 끝없이 바라시는 분이라고. 그 친밀함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두려움이 아니라 안전함을 배우고, 심판이 아니라 포옹을 경험하며, 자격이 아니라 은총을 알게 됩니다. 그때 인간의 언어는 달라집니다. 교리의 언어보다 연인의 언어가 더 많아지고, 명령보다 그리움이 커지며, 의무보다 감사가 깊어지고, 계산보다 황홀이 앞서기 시작합니다. 끝없이 기다리고, 끝없이 용서하며, 끝없이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이 친밀함에서 태어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혼인잔치는 가장 깊은 상호 내어줌의 자리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안전한 집이 되는 사건입니다. 연인은 서로 앞에서 갑옷을 벗습니다. 숨기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모두 연인의 언어입니다. 그리움. 황홀함. 기다림. 용서. 포옹. 눈물. 감사. 침묵. 이 언어들은 종교적 의무를 설명하는 단어가 아니라 관계가 깊어질 때 자연스럽게 태어나는 언어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이 잔치로 초대합니다. 더 이상 두려움으로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는 손님이 아니라 사랑받는 신부처럼 하느님 품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르십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초대를 평생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벌거벗은 채 아버지의 집을 떠날 수 있었고, 가진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세상 누구보다 풍요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성프란치스코가 경험한 신비주의의 출발은 안전함의 경험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통찰은 인간이 먼저 윤리적으로 완전해져서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무조건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고 용서받는 경험이 모든 변화를 시작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은총의 질서는 우리는 바뀌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때문에 바뀝니다. 우리는 완전해져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가까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조금씩 완전해져 갑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성체성사의 논리입니다. 먼저 내어주시는 몸과 먼저 흘리시는 피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선종 팔백 주년은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두려움으로 하느님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받는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복음을 의무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혼인잔치의 초대로 받아들이는가? 아직도 내 왕국을 지키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 나라가 내 안에서 자유롭게 흐르도록 자신을 내어드리고 있는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복음의 첫 문장을 다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뀌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때문에 변화된다는 은총의 질서를 다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루라고 말하기 전에 누구에게 붙들려 있는지를 먼저 알려 줍니다.

 

다시 형제성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사람 안에서 같은 하느님의 숨결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형제성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같은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품어 주는 삶입니다. 형제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복음을 살아가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서로의 상처를 숨기지 않아도 되고,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며, 약함 때문에 밀려나지 않는 공동체, 서로가 서로의 안전한 집이 되어 주는 삶,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꿈꾸었던 형제성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영원부터 서로를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순환처럼, 형제성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받아들이며 다시 내어주는 사랑의 흐름입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세상을 정복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다정함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하신 방식 그대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먼저 들어 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믿어 주며, 먼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전함을 경험한 만큼 세상을 안전하게 만들고, 우리가 사랑받은 만큼 세상을 사랑하며, 우리가 용서받은 만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말은 위로가 되고, 우리의 침묵은 쉼이 되며, 우리의 미소는 복음이 되고, 우리의 기다림은 희망이 됩니다.

 

이것이 선종 팔백 년을 맞이한 프란치스코가 오늘 우리에게 남기는 마지막 부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복음은 책 속에 머무르지 말고 삶이 되십시오. 형제성은 구호가 아니라 관계가 되십시오.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가야 할 자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그 사랑의 흐름을 가로막지 말고 기꺼이 비워진 통로가 되십시오. 그때 우리의 삶도 프란치스코의 삶처럼 하나의 긴 찬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성체처럼 내어주는 삶이 되고, 우리의 관계가 혼인잔치의 기쁨이 되며, 우리의 공동체가 삼위일체 사랑의 살아 있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우리를 통하여 다시 복음을 읽고, 다시 형제를 만나며, 다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성 프란치스코 선종 팔백 주년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아름다운 초대이며, 오늘도 계속되는 복음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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