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숨어서 해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이 말씀은 마태오 복음 6장에서 가르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방법을 가르치시기 전에 먼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십니다. 그분은 높은 곳에서 업적을 평가하는 심판관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을 봅니다. 결과를 보고, 성과를 보고, 직함을 보고, 명예를 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십니다.
말하지 못하고 삼킨 눈물, 아무도 모르게 견뎌낸 인내,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드린 기도, 인정받지 못해도 끊임 없이 행한 섬김, 상처를 안고도 포기하지 않은 사랑을 보십니다. 세상은 열매를 보지만, 하느님은 뿌리를 보십니다. 세상은 박수를 치는 무대를 보지만, 하느님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을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골방은 단순한 공간이 아닙니다. 그곳은 내가 하느님 앞에서 더 이상 꾸미지 않는 자리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에서 말하는 내적 가난도 바로 이 골방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가 한 일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내 선행이 알려지기를 원하는 마음까지도 내려놓고, 오직 하느님께만 보이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을 단순히 가진 것이 없는 상태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가난은 하느님 외에는 붙들 것이 없는 자유였습니다. 그래서 참된 가난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시선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성부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성자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성자께서는 자신을 비우고 아버지를 드러내시며, 성령께서는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우리 안에 흘려보내십니다.
사랑은 본래 자신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은 드러나기보다 내어주기를 원합니다. 어머니가 밤새 아픈 아이 곁을 지키는 일, 아무도 모르게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의 수고, 공동체 안에서 알아주는 이 없어도 묵묵히 봉사하는 형제자매의 손길,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조용히 축복을 빌어 주는 기도. 이 모든 것은 세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밝게 빛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갚아 주신다"는 말씀도 세상의 보상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상은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더 깊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숨은 곳에서 사랑한 사람은 숨은 곳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선을 행한 사람은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 갑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영혼을 가장 풍요롭게 하는 것은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것이며,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대개 세상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조용히 자신을 내어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숨어 계신 아버지를 향해 살아가는 사람은 점점 더 숨어 계신 하느님의 방식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마치 땅속 깊은 곳의 샘물이 아무 소리 없이 나무를 키워 내듯이, 하느님의 은총도 우리 안에서 조용히 흐르며 겸손과 가난과 형제애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결국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증거가 됩니다.
"선하다는 의식 없이 행하는 선이야말로 진짜 선입니다."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선은 이미 '나'를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지,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선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꽃은 자신이 향기롭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고 향기를 내고, 태양은 자신이 세상을 비춘다는 사실을 자랑하지 않으며, 샘물은 자신이 누구의 목을 축여 주는지 계산하지 않고 흐릅니다. 하느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해를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내려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이 선을 베푼다는 의식으로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이 말하는 내적 가난도 바로 여기에 닿아 있습니다. 내가 선한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내려놓는 것,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의식마저 비우는 것, 내 공로와 덕행을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쓸모없는 종"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선을 이루는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신은 다만 은총이 지나가는 작은 통로요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사라질 때 더욱 깊어집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돌보면서"나는 지금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듯이, 진정한 친구가 친구의 아픔을 들어주면서 "나는 지금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계산하지 않듯이, 깊은 사랑은 의식보다 먼저 움직입니다.
선을 행하려고 애쓰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단계는 선이 습관이 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단계는 선이 존재가 되는 단계입니다. 그 단계에서는 용서가 특별한 결단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숨결이 되고, 나눔이 희생이 아니라 기쁨이 되며, 섬김이 의무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됩니다. 마치 나무가 열매 맺는 것을 의식하지 않듯이, 참된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자신이 선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성숙은 "나는 선한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사랑하고 계신다."라는 깨달음에 가깝습니다. 그때 선은 더 이상 업적이 아니라 은총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바꾸어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