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의 신비 안에서 보내심과 맞아들임의 실재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 위에는 손에 쥔 것이 아니라 비워진 손바닥 위에 내려앉는 은총이 흐르고, 그 은총은 언제나 ‘누군가를 통해’ 우리에게 도착합니다. 나는 그 길의 한가운데에 서서 오늘도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나를 흔들어 놓는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오래된 복음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보내심과 맞아들임의 신비,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것이 곧 그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라는 조용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선언. 그 말씀은 내가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를 묻기 전에 내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나는 지금 사람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람을 통해 나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보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내 안의 많은 것들이 무너집니다. 판단하려는 습관, 소유하려는 욕망, 내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그림자들. 그 모든 것이 하나씩 손에서 떨어져 나갈 때, 나는 비로소 프란치스칸의 길 위에 서게 됩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자유와 겸손, 그리고 작음과 형제애, 이것이 내적 가난의 기초들입니다. 내적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공간입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채워질 수 있고, 쥐고 있지 않기 때문에 흘러갈 수 있으며,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있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통해 오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일 수 있는 자리. 그래서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머물다 가도록 허락하는 여백이 있습니다. 그 여백 속으로 낯선 이가 들어오고, 그 낯선 이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이 조용히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때, 관계는 더 이상 거래가 아니라 은총이 됩니다.
나는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나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걸었던 길입니다. 그는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비웠습니다. 그의 가난은 소유의 포기가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었고, 관계의 회복은 내려가고 내려놓기 위하여 많이 ‘비워진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남들이 나에게 붙여준 딱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상실이 아니라 모든 것을 형제로 부를 수 있는 놀라운 자유의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난을 통하여 자유를 얻는 법을 배웠고 죽음을 앞둔 몇 년 동안은 자유롭기 위하여 가난을 선택하셨습니다. 형제 태양, 자매 달, 그리고 가장 작은 이들까지. 그는 모든 존재를 ‘맞아들이는 존재’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가난한 자리로, 비워진 마음으로 찾아오신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안을 비웁니다. 조금 더 판단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소유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나 자신을 비우기 위해, 내려가고 내려놓기 위해. 그리고 그 비워진 자리에서 한 사람을 다시 만납니다. 그는 여전히 평범하고, 여전히 나와 다르며,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지니고 있지만, 나는 이제 압니다. 그를 통해 누군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아니, 이미 와 계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를 향해 문을 엽니다. 내 마음의 문을, 내 시간의 문을, 내 존재의 문을. 그리고 그 문을 지나 하느님이 들어오십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렇게 보내심과 맞아들임의 신비는 오늘도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가난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내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마음,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 손,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사랑. 그 가난 안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을 얻습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13, 20.)
‘파견’은 사건이 아니라 흐름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구조(성부 → 성자 → 제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랑의 흐름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제자들은 다시 삶 속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즉, 우리는 단순히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선의 흐름이 통과하는 통로이며 도구들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는 순간 내가 말을 건네고, 귀를 기울이고, 손을 내밀 때 그 만남은 이미 나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관계의 연장선이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이렇게 다시 들립니다. “너를 통해 내가 간다.”
‘맞아들임’은 감정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을 조건으로 판단합니다. 나에게 유익한가? 나를 존중하는가? 나와 맞는가? 하지만 이 말씀은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보다 “그를 통해 누가 오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맞아들임’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입니다. 불편한 사람 안에서도, 나를 힘들게 하는 관계 안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타인 안에서도, 그 사람을 통해 나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눈입니다.
가장 구체적인 자리인 일상의 관계에서
이 말씀은 특별한 선교 상황보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에서 더 강하게 드러납니다. 말을 건네는 가족, 함께 일하는 동료,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 도움을 요청하는 낯선 이, 이 모든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파견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뀝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이며 관계의 질은 신앙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결국 신앙은 성당 안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믿음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안에서 나의 태도로 드러납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의 태도를 보고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하셨습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맞아들이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파견된 이’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한 방향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보내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얼굴로 가고 있는가? 나를 통해 하느님이 드러나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만 드러나고 있는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말씀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은 하느님이 서로를 찾아가시는 사건이다.” 우리가 오늘 만나는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사람이 편안한 사람이든, 불편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이렇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통해 지금 하느님이 나를 찾아오고 계신다.” 그 순간, 관계는 달라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도 생각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이 됩니다. 그러나 내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는 이는 피해야 합니다. 맞아들이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폭력과 파괴로, 말과 행동으로 관계를 해치는 이들은 조심성 있게 멀리 해야합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없는 대상들은 우리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 위에는 손에 쥔 것이 아니라 비워진 손바닥 위에 내려앉는 은총이 흐르고, 그 은총은 언제나 ‘누군가를 통해’ 우리에게 도착합니다. 나는 그 길의 한가운데에 서서 오늘도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나를 흔들어 놓는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오래된 복음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보내심과 맞아들임의 신비,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것이 곧 그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라는 조용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선언. 그 말씀은 내가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를 묻기 전에 내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나는 지금 사람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람을 통해 나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보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내 안의 많은 것들이 무너집니다. 판단하려는 습관, 소유하려는 욕망, 내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그림자들. 그 모든 것이 하나씩 손에서 떨어져 나갈 때, 나는 비로소 프란치스칸의 길 위에 서게 됩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자유와 겸손, 그리고 작음과 형제애, 이것이 내적 가난의 기초들입니다. 내적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공간입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채워질 수 있고, 쥐고 있지 않기 때문에 흘러갈 수 있으며,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있지 않기 때문에 타인을 통해 오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일 수 있는 자리. 그래서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머물다 가도록 허락하는 여백이 있습니다. 그 여백 속으로 낯선 이가 들어오고, 그 낯선 이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이 조용히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그때, 관계는 더 이상 거래가 아니라 은총이 됩니다.
나는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나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맞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걸었던 길입니다. 그는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비웠습니다. 그의 가난은 소유의 포기가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었고, 관계의 회복은 내려가고 내려놓기 위하여 많이 ‘비워진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남들이 나에게 붙여준 딱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상실이 아니라 모든 것을 형제로 부를 수 있는 놀라운 자유의 시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난을 통하여 자유를 얻는 법을 배웠고 죽음을 앞둔 몇 년 동안은 자유롭기 위하여 가난을 선택하셨습니다. 형제 태양, 자매 달, 그리고 가장 작은 이들까지. 그는 모든 존재를 ‘맞아들이는 존재’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가난한 자리로, 비워진 마음으로 찾아오신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안을 비웁니다. 조금 더 판단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소유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나 자신을 비우기 위해, 내려가고 내려놓기 위해. 그리고 그 비워진 자리에서 한 사람을 다시 만납니다. 그는 여전히 평범하고, 여전히 나와 다르며,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지니고 있지만, 나는 이제 압니다. 그를 통해 누군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아니, 이미 와 계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를 향해 문을 엽니다. 내 마음의 문을, 내 시간의 문을, 내 존재의 문을. 그리고 그 문을 지나 하느님이 들어오십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렇게 보내심과 맞아들임의 신비는 오늘도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가난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내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마음,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 손,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사랑. 그 가난 안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을 얻습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요한13, 20.)
‘파견’은 사건이 아니라 흐름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구조(성부 → 성자 → 제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랑의 흐름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제자들은 다시 삶 속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즉, 우리는 단순히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선의 흐름이 통과하는 통로이며 도구들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는 순간 내가 말을 건네고, 귀를 기울이고, 손을 내밀 때 그 만남은 이미 나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관계의 연장선이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이렇게 다시 들립니다. “너를 통해 내가 간다.”
‘맞아들임’은 감정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을 조건으로 판단합니다. 나에게 유익한가? 나를 존중하는가? 나와 맞는가? 하지만 이 말씀은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보다 “그를 통해 누가 오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맞아들임’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입니다. 불편한 사람 안에서도, 나를 힘들게 하는 관계 안에서도, 이해되지 않는 타인 안에서도, 그 사람을 통해 나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눈입니다.
가장 구체적인 자리인 일상의 관계에서
이 말씀은 특별한 선교 상황보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에서 더 강하게 드러납니다. 말을 건네는 가족, 함께 일하는 동료,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 도움을 요청하는 낯선 이, 이 모든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파견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뀝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이며 관계의 질은 신앙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결국 신앙은 성당 안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믿음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안에서 나의 태도로 드러납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의 태도를 보고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하셨습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맞아들이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파견된 이’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한 방향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보내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얼굴로 가고 있는가? 나를 통해 하느님이 드러나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만 드러나고 있는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말씀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은 하느님이 서로를 찾아가시는 사건이다.” 우리가 오늘 만나는 한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사람이 편안한 사람이든, 불편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이렇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통해 지금 하느님이 나를 찾아오고 계신다.” 그 순간, 관계는 달라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도 생각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이 됩니다. 그러나 내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는 이는 피해야 합니다. 맞아들이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폭력과 파괴로, 말과 행동으로 관계를 해치는 이들은 조심성 있게 멀리 해야합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없는 대상들은 우리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