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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프란치스코회, 작은형제회, 성 프란치스코, 아씨시, 프란치스칸, XpressEngine1.7.11, xe sty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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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명의 빵이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깊은 계시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백성들은 다시 배가 고팠고, 세상의 모든 양식도 잠시 우리를 채울 뿐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빵이 되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빵은 가장 평범한 음식입니다. 화려하지 않고, 매일 필요하며,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빵은 쪼개질 때 나누어집니다. 밀알이 부서지고 반죽이 치대어지고 불 속을 지나야 빵이 되듯, 주님의 생애 또한 가난과 수고와 수난을 지나 인류를 위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먹여 살리는 사랑의 제단이었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이 말씀은 지금 메마른 마음, 지친 관계, 상처 입은 영혼, 방향을 잃은 삶 안으로 들어와 오늘을 살게 하는 힘이 내가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빵을 찾아 헤맵니다. 인정이라는 빵, 성공이라는 빵, 소유라는 빵, 비교 우위라는 빵.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곧 다시 허기집니다. 욕망은 채워질수록 더 커지고, 경쟁은 얻을수록 더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빵은 다릅니다. 먹을수록 평화가 깊어지고, 받을수록 나누고 싶어지며, 모실수록 내 안에 감사가 자랍니다. 가톨릭 신앙 안에서 이 말씀은 특별히 가톨릭교회의 성체성사 안에서 빛납니다. 제대 위의 작은 빵 안에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세상 눈에는 보잘것없는 조각 같지만, 믿음의 눈에는 하늘과 땅을 잇는 생명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가르치기만 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너의 양식이 되러 왔다. 네가 나를 받아 모실 때, 내 생명이 너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

 

프란치스칸의 눈으로 보면, 이 말씀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가장 낮은 빵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우주의 창조주께서 인간의 손에 들리는 작은 성체 안에 머무십니다. 무한하신 분이 유한한 조각 안에 자신을 숨기십니다. 이보다 큰 겸손은 없습니다. 이보다 깊은 가난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빵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성당에 다녀오는 행위가 아닙니다. 나도 누군가의 빵이 되는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배고픈 이에게 위로의 빵이 되고 외로운 이에게 경청의 빵이 되며 절망한 이에게 희망의 빵이 되고 상처 입은 이에게 자비의 빵이 되는 것, 주님을 먹는 사람은 결국 주님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도 세상은 많은 빵을 내놓지만, 영혼의 허기를 채우는 빵은 하나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찾던 것은 멀리 있지 않다. 내가 너의 생명의 빵이다.”

 

생명의 빵과 변화의 비밀

우리가 바뀌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비로소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복음의 중심이며, 인간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가장 깊은 소식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 더 착해져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더 거룩해져야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흠이 없어져야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계산법이지 하느님의 방식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보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시작이며, 근원이며, 먼저 오는 은총입니다. 우리가 아직 미완성일 때, 넘어지고 흔들릴 때, 스스로도 자신을 사랑하기 어려울 때조차 하느님은 우리를 향해 이미 사랑으로 움직이고 계십니다. 그래서 변화는 조건이 아니라 응답입니다. 사랑받기 위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음을 알기에 변하기 시작합니다.

 

빵은 하느님의 사랑 방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신 것은 우연한 비유가 아닙니다. 빵은 양식이며, 매일 필요한 것이고, 누구나 먹을 수 있으며, 자신을 소모하여 타인을 살리는 음식입니다. 빵은 자신을 지키지 않습니다. 쪼개어질 때 비로소 의미를 얻습니다. 사라짐으로 누군가의 생명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멀리서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와 양식이 되시는 분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십자가는 그 사랑의 완성이고, 성체는 그 사랑의 지속입니다.

 

먹는 이는 닮아갑니다. 빵을 먹는 사람은 그 빵으로 살아갑니다.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단지 종교 의식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건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은 서서히 바뀝니다. 닫힌 마음이 열리고 거친 말이 부드러워지고 움켜쥐던 손이 나누는 손이 되며 판단하던 눈이 자비의 눈으로 변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가장 깊이 받아들인 것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먹은 이는 사랑을 살게 됩니다.

 

앎은 변화의 기초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친교입니다. 머리로 설명하는 지식이 아니라, 존재로 만나는 체험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안다는 것은, 문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상처 속에서도 나를 떠나지 않으시는 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앎은 사람을 바꿉니다. 두려움으로 살던 사람이 신뢰하게 되고, 결핍 속에 허덕이던 사람이 감사하게 되며, 자기중심으로 굳어 있던 사람이 형제애로 열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변화의 기초는 의지력이 아니라 사랑의 체험입니다.

 

프란치스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변화시킨 힘이 자기 수련이 아니라,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난을 선택했고, 작은 자가 되었으며, 모든 피조물을 형제로 불렀습니다. 사랑받은 사람만이 작아질 수 있습니다.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만이 내어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충만한 사람만이 세상을 경쟁자가 아니라 형제로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우리가 바뀌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고 있기에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해져서 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빵을 받아 먹기에 선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 안에 오셨기에 우리가 그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은 마침내 자신도 누군가의 빵이 됩니다. 쪼개어 주는 말 한마디, 기다려 주는 인내 한 조각, 용서해 주는 따뜻함 한 덩이, 함께 울어 주는 자비, 마지막 한덩이를 너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는 한 끼 식사처럼.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압니다. 사랑은 명령이 아니라 먹고 살아내는 생명이라는 것을 가슴으로 알아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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