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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한 가운데서 비움으로 얻는 생명의 길

 

내적 가난의 신비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소식은 없을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미국과 이스라엘이 한편이 되어 이란과 중동 전체에 전쟁의 회오리가 휩쓰는 가운데서 이름모를 이들이 생명을 잃고 부상당하고 쫒겨나고 피흘리는 참혹한 현실은 인류전체에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쟁의 현실 안에서 믿는 이들의 겪는 아픔과 그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의 마음을 상상해 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를 바라보면, 이 진실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중동의 땅에서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무너진 집들 사이로 울부짖는 아이들의 울음, 사랑하는 이를 잃고 무너지는 가족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고통 속에 던져진 수많은 생명들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누구의 편에 서 계신가. 그러나 십자가는 이미 그 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한 편의 승리를 위해 서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폭격 속에서 떨고 있는 아이의 곁에, 잿더미 위에 무너져 앉은 어머니의 곁에, 이름 없이 쓰러져 가는 모든 생명의 자리 한가운데에 계십니다. 그분은 고통을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통 안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십자가에 달리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편을 가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경계와 울타리, ‘우리그들을 나누는 모든 기준을 넘어, 그분은 오직 상처 입은 생명 그 자체에 충실하십니다. 우리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묻기 전에, 그분은 고통받는 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인간의 탐욕이 저지르는 끔찍한 전쟁의 한 복판에서도 세상은 끊임없이 채우라고 말하고, 더 많이 움켜쥐라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손에 쥔 것의 무게로 자신을 증명하라고 속삭이며, 더 많이 소유할수록 더 안전해질 것이라 약속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비움의 자리, 그 아무것도 없는 골짜기에서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샘이 솟아난다고 조용히 일러줍니다. 이 길은 세상의 논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흐르지만, 그 역설 속에 참된 생명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프란치스칸의 내적 가난은 단순히 물질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라는 중심을 내려놓는 일이며, 스스로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근원적인 전환입니다. 내가 쌓아온 지식과 명성, 붙들고 있던 생각과 계획, 심지어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염려까지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순간, 영혼은 비로소 가벼워지기 시작합니다. 그 가벼움은 단순한 해방감이 아니라, 죽음의 문턱을 넘어 생명의 자리로 건너가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비워질수록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생명에 닿게 됩니다. 이 여정은 겨울 끝자락의 나무와도 닮아 있습니다. 모든 잎을 떨구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듯 서 있지만, 실은 가장 깊은 곳에서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시간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모든 것을 맞이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를 주장하지 않을 때에만 타인의 아픔이 내 안에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열리고, 비워진 자리에서 비로소 참된 관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비움은 우리를 더 깊은 자리로 이끕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분은 언제나 십자가에 달린 이들의 편에 서 계십니다. 특정한 종교나 민족, 이념이나 진영에 속하지 않으시고, 오직 고통이 있는 자리, 상처 입은 존재가 있는 그곳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울타리를 세웁니다. 내가 속한 편, 내가 옳다고 믿는 정의,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계를 붙들며 그 안에서 안전을 확보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며 안심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 울타리를 조용히 허무십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모든 기준이 무너질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어떤 확신이나 체계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품뿐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이미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말씀은 더 이상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의 실재가 됩니다. 이 믿음은 어떤 관념이 아니라, 이미 성벽을 허물고 광야로 나선 이들의 존재 방식입니다. 손에 쥔 것이 없기에 심판의 저울 위에 올릴 것도 없고, 그 가벼움으로 인해 우리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를 지나 영원의 들판 위에 서 있게 됩니다. 믿음은 무엇을 더 가지는 일이 아니라, 더 이상 붙들 것이 없음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는 자유입니다.

 

스스로 일어섰다고 믿는 순간, 우리의 종교는 서서히 오염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게 되고, 은총의 자리에서 벗어나 정당화의 논리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비움의 자리로 돌아갈 때, 십자가 아래로 내려갈 때, 우리는 다시 보게 됩니다. 그분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서 계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믿음은 더 이상 올바른 편에 서는 일이 아니라, 고통이 있는 자리로 함께 내려가는 일이 됩니다. 희망은 미래의 보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의 품에 자신을 맡기는 신뢰가 됩니다. 그리고 선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흘러가도록 허락되는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자만심, 두려움,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과 같은 내면의 돌들이 하나씩 내려놓아질 때, 선은 자연스럽게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우리는 더 이상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이 지나가는 자리, 선이 머물다 가는 길이 됩니다. 누군가의 눈물이 내 안에서 울리고, 누군가의 기쁨이 내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가 서로를 통해 살아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비움의 끝에는 고요만이 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유의 넘침이 아니라, 흘러감의 넘침입니다. 붙잡지 않기에 끊어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기에 고갈되지 않는 하느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통해 계속해서 흐르게 됩니다.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얼마나 가졌는지를 묻지 않고, 얼마나 사랑이 흘러가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바로 그 질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살아 있음은 먼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 영원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하늘의 신비를 담기 위해 준비된 가장 깨끗하고 투명한 그릇입니다. 그 비어 있는 고요 속에서 영생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오늘 하루를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깊은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공멸로 향하는 전쟁의 한 가운데서 인류가 공존하는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언제나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계시는 그분의 마음과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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