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Skip to content
조회 수 150 추천 수 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무의식의 수면 아래서 건져 올린 가난의 노래

 

아침 빛은 소리 없이 낮은 담장을 넘습니다. 그 빛은 화려한 치장을 거부하고, 가장 어둡고 습한 구석부터 조용히 스며듭니다. 나는 그 빛 아래서 내 무의식의 심연을 들여다봅니다. 겹겹이 쌓인 의식의 층위를 걷어내면, 그곳엔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거대한 결핍과 계산의 흔적들이 화석처럼 굳어 있습니다.

 

가난은 단순히 주머니가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 존재를 지탱하던 가장 은밀한 기둥들, ‘내가 옳다는 완고한 신념, ‘내가 더 희생했다는 자기연민의 기억, ‘결국 나는 이해받아야 한다는 지독한 인정의 욕구가 뿌리째 뽑혀 나가는 사건임을 마주합니다. 무너짐이 주는 경이로운 평화를 경험한 사람은 가난의 신비를 일상 속에서 살아냅니다.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는 감출 비밀이 없고, 자신을 증명할 명분도 필요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난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성벽이 무너진 자리입니다. 지킬 성벽이 없으니 적군도 없고, 잃을 것이 없으니 비로소 두려움의 감옥에서 해방됩니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 나를 지배하던 생존의 공포가 비움의 빛 앞에서 녹아내립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나의 진심을 왜곡하고, 누군가는 나의 침묵을 오만으로 읽어냅니다. 예전의 나는 그 오해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내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 수천 마디의 말을 쌓아 올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무의식적인 반격의 본능을 잠시 멈춥니다. ‘내가 옳다는 비대한 자아의 빵을 내려놓고, 그 허기진 자리를 하느님의 자비로 채웁니다. 텅 빈 공간에 고이는 것은 차가운 소외가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부드럽고 투명한 평화입니다.

 

단순함은 나를 설명하려는 강박에서 놓여나는 것이며 기쁨은 자아라는 무거운 외투를 벗어 던졌을 때 찾아오는 영혼의 가벼움이고 십자가는 자아의 중심이 전복되는 자리였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종종 십자가라는 고통을 건너뛰고 부활의 영광만을 움켜쥐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변형 없는 변화이며, 죽지 않은 자아가 꿈꾸는 기만적인 환상일 뿐입니다.

 

프란치스코가 몸에 새긴 오상의 흔적은 고통의 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아의 중심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사건이며 백기를 들고 항복을 선언한 실재였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쌓아온 모든 명분이 발가벗겨지는 자리입니다. “이제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절박한 질문 앞에, 내가 의지하던 모든 세상의 끈이 끊어질 때 남는 것, 그 벌거벗은 단독자로서의 실존이 바로 참된 가난입니다. 부활은 자아의 연장이 아니라, 완전히 죽은 자 위로 돋아나는 전혀 새로운 생명의 질서입니다.

 

내 안에 비워진 공간, 그곳이 곧 하느님의 자리였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겪는 수치와 오해, 내 정당성이 짓밟히는 그 지점이 바로 나의 십자가였습니다. 내가 나를 변호하기를 포기하고 그 모든 혼란을 하느님께 오롯이 맡겨드릴 때, 내 무의식의 지배권은 비로소 나에게서 하느님께로 넘어갑니다. 그 침묵의 용광로 속에서 비대한 자아는 타버리고, 그 재 위에서 자유라는 이름의 꽃이 피어납니다. 가난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넓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차지한 공간이 적어질수록, 내 안에서 하느님이 숨 쉬실 공간은 커지고 내가 소유의 손길을 거둘수록, 형제들이 머물 자리는 넓어질 것입니다.

 

나는 오늘 내 안의 복잡한 계산서들을 불태웁니다. 누가 더 높고 낮은지, 누가 더 인정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목록을 바람에 날려 보냅니다. 남는 것은 오직 하나, 소박한 숨 한 줄기와 우리는 모두 연결된 형제다라는 떨리는 고백뿐입니다. 길가의 들꽃처럼, 자신의 이름을 고집하지 않고 피었다 지는 그 단순한 순종을 닮고 싶습니다. 내 말의 무게를 줄이고, 내 자존심의 부피를 깎아내어, 당신이 온전히 거하실 수 있는 빈 들판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이제 무거운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작은 형제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의 존재는 이미 충분합니다.

 

 


  1. No Image

    평화의 전달자

    미국 시카고에 있는 작은형제회 Robert Hutmacher 형제는 '평화의 전달자'라는 프란치스코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다른 음악가들과 화가의 도움을 받아, 이 책에 음악과 미술을 가미하여 흥미롭게 프란치스코의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저는 그...
    Date2026.02.08 By김상욱요셉 Views411
    Read More
  2. No Image

    변덕이 출장 갔다 온 날

    변덕이 출장 갔다 온 날   어제는 봄날이더니 오늘은 한겨울 오늘은 날씨 만큼이나 변덕스런 마음을 그려보았다 변덕도 사람이다 싶어 더 크게 웃음이 난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기상청도 포기할 만큼 예측이 안 된다. 아침에는 햇살처럼 활짝 웃으며 “오...
    Date2026.02.06 By이마르첼리노M Views551
    Read More
  3. No Image

    유연하고 맑고 따스한 관계의 무늬 결

    유연하고 맑고 따스한 관계의 무늬 결   상처라는 덜 알려진 무늬는 유연하고 맑고 따스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현재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합니다. 우리는 삶이 언제나 불그레한 꽃길이거나 눈부신 황금빛 평원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
    Date2026.02.06 By이마르첼리노M Views483
    Read More
  4. No Image

    낮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붉은 백합처럼

    낮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붉은 백합처럼   성녀 아가다의 축일에 관계의 상처를 안고 걷는 이들을 생각하며…   성녀 아가다의 고향인 카타니아의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도 기도는 식지 않는 불꽃이었습니다. 몸은 부서지고 숨은 떨렸으나, 침묵은 꺼지지 않는 ...
    Date2026.02.05 By이마르첼리노M Views493
    Read More
  5. No Image

    추위를 타는 영혼의 노래

    추위를 타는 영혼의 노래   우리는 본능적으로 매끈하고 안락한 길만을 탐합니다. 아픔은 흉터가 될까 두려워 피하고, 실패는 부끄러움이라 여겨 가리며, 나약함은 들키지 않아야 할 치부로 숨겨둡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을 피해 도망치는 그 비겁한 안락 ...
    Date2026.02.04 By이마르첼리노M Views539
    Read More
  6. No Image

    부산물로써 얻는 하느님 나라

    부산물로써 얻는 하느님 나라   진정한 평화의 도구가 된다는 것은, 나를 지우고 타인의 풍경이 되어주는 일입니다. 상대의 고요한 마음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지 않도록, 나의 목소리를 낮추고 발걸음을 줄이는 배려입니다. 그것은 요란한 친절이 아니라...
    Date2026.02.03 By이마르첼리노M Views525
    Read More
  7. No Image

    주님 봉헌 축일에 부르는 생명의 노래

    주님 봉헌 축일에 부르는 생명의 노래   성전에서 바치는 봉헌의 노래   차가운 석조 기둥 사이로 겨울 햇살이 가늘게 부서져 내릴 때 가장 낮은 곳에서 온 어린 생명이 가장 높은 분의 품으로 안깁니다.   화려한 제물도, 웅장한 찬미가도 없으나 가난한 부...
    Date2026.02.02 By이마르첼리노M Views559
    Read More
  8. No Image

    역설의 지혜

    역설의 지혜 2026,2,1 독서:1고린 1,27-30 복음 마태오 5,1-12   세상은 늘 우리에게 우월감을 부추깁니다. 똑똑한 말로 상대를 압도하고, 빈틈없는 논리로 나의 옳음을 증명하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함의 성벽을 쌓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비참해지지...
    Date2026.02.01 By이마르첼리노M Views514
    Read More
  9. No Image

    삶의 강가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고독의 무게

    삶의 강가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고독의 무게   고요가 내려앉은 강가, 물결은 숨죽인 듯 흘러가고 잔잔한 수면에 하늘의 고뇌와 평화가 그림자처럼 드리웁니다. 발목을 적시는 차가운 물은 지난 시간의 강물인 듯, 닿을 때마다 저릿한 기억들을 건져 올립니다...
    Date2026.01.31 By이마르첼리노M Views472
    Read More
  10. No Image

    복음의 핵심에 따른 우리 믿음의 태도에 대한 묵상

    복음의 핵심에 따른 우리 믿음의 태도에 대한 묵상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부르심 앞에서 말씀에 굴복하고 누리고 내어주라는 응답 앞에 선다는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해 움켜쥐던 손을 조용히 펴는 일입니다. 그 손을 펴지 못해 우리는 얼마나 자주 ...
    Date2026.01.30 By이마르첼리노M Views515
    Read More
  11. No Image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라 (복음의 핵심)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라 (복음의 핵심)   길 위에서 발생하는 복음은 작음으로 걷고 사랑으로 머물며 관계 안에 선의 흐름을 따라 걷는 길입니다. 따르고,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복음의 핵심 말씀은 일상의 먼지 묻은 길 위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복음으로...
    Date2026.01.29 By이마르첼리노M Views541
    Read More
  12. No Image

    믿음의 기초를 이루는 세가지 확신에 대한 묵상 1

    믿음의 기초를 이루는 세가지 확신에 대한 묵상 1   사랑의 자리, 그 눈부신 떨림에 대하여 찬란히 떠 오르는 햇살아래 묵상의 날개를 폅니다. 겨울 아침의 성에조차 햇살을 품으면 보석이 되듯, 우리의 삶이 비루하고 거칠게 느껴질 때조차 결코 사라지지 않...
    Date2026.01.27 By이마르첼리노M Views513
    Read More
  13. No Image

    믿음의 기초를 이루는 세가지 확신에 대한 묵상 2

    믿음의 기초를 이루는 세가지 확신에 대한 묵상 2   2. 나는 그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은 가난한 마음으로 누리는 축복입니다. 우리 믿음의 가장 취약하고 관심에서 멀어진 믿음의 현장에는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없거나 아주 미약...
    Date2026.01.27 By이마르첼리노M Views451
    Read More
  14. No Image

    믿음의 기초를 이루는 세가지 확신에 대한 묵상 3

    믿음의 기초를 이루는 세가지 확신에 대한 묵상 3   3. 나의 자유는 사랑 받고 있음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다. 나의 자유는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있다는 사실은 예속이 아닌 기쁜 투신 안에서 더 깊게 알 수 있습니다. 자유란 내 마음대로 선택하는 방종이 아...
    Date2026.01.27 By이마르첼리노M Views477
    Read More
  15. No Image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2026,1,26 .독서와 복음 묵상)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2026,1,26. 독서와 복음 묵상)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가 10,5) 이 말씀은 관계의 문을 여는 예의가 아니라 영혼의 방향을 바로 세우는 복음의 첫 자세입니다. 평화를 빈다는 것...
    Date2026.01.26 By이마르첼리노M Views543
    Read More
  16. No Image

    성프란치스코의 여섯가지 덕행에 대한 묵상

    성프란치스코의 여섯가지 덕행에 대한 묵상   성 프란치스코가 모든 덕행에 드린 찬미의 노래인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는 가난과 겸손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그의 영성이 응축된 아름다운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는 단순히 덕행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Date2026.01.25 By이마르첼리노M Views488
    Read More
  17. No Image

    온유한 마음에 성령의 불이 닿으면

    온유한 마음에 성령의 불이 닿으면   이른 새벽, 아직 말이 깨어나기 전의 시간에 나는 노트북을 켜고 하루를 엽니다. 화면이 켜지는 동안 그 짧은 공백 속에서, 하느님은 늘 그렇듯 가장 먼저 나에게 오십니다. 기도란 거창한 말이 아니라 아직 누구에게도 ...
    Date2026.01.24 By이마르첼리노M Views496
    Read More
  18. No Image

    프란치스칸 작음의 영성이 이 시대에 주는 희망의 메시지

    프란치스칸 작음의 영성이 이 시대에 주는 희망의 메시지   더 높이 오르라는 시대에, 아래로 내려가는 자유 오늘의 세계는 끊임없이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강해지라고 우리를 재촉합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칸 작음의 영성은 반대의 길을 제시합니다. 위로 ...
    Date2026.01.22 By이마르첼리노M Views508
    Read More
  19. No Image

    오그라든 인생길에 펼쳐진 인생길을 가려면 2

    오그라든 인생길에 펼쳐진 인생길을 가려면 2   상처를 길의 안내자로 받아들이기 인생길이 곧게 펴진다는 것이 고통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펼쳐진 길로 가려면: 오그라들었던 흔적, 즉 인생의 옹이와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프란치스코 성인...
    Date2026.01.21 By이마르첼리노M Views479
    Read More
  20. No Image

    오그라든 인생길에 펼쳐진 인생길을 가려면 1

    오그라든 인생길에 펼쳐진 인생길을 가려면 1   1. 오그라든 손에 대한 통찰   오그라든 인생길에서 활짝 펼쳐진 인생길로 나아가는 것은, 단순히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의 문법이 바뀌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그라든 손을 펴고 그 길을 ...
    Date2026.01.21 By이마르첼리노M Views513
    Read More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6 ... 91 Next ›
/ 91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Copyright© 1937-2012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OFMKOREA, All rights reserved.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홍보팀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