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
프란치스칸 관점에서 바라보는 눈으로 관계의 현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우리는 매일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TV와 신문의 헤드라인과 휴대폰의 알림, 성과와 효율을 계산하는 표와 숫자들 한가운데서 말씀은 언제나 조용히 묻습니다. “너는 어느 지혜를 따라 걷고 있느냐.” 세상의 지혜는 늘 분주합니다. 더 안전한 쪽을 택하라고 말하고, 손해 보지 않는 거리만큼만 마음을 열라고 조언합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미리 벽을 세우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조금 접어두라고 속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능숙해집니다. 말을 아끼는 법보다 마음을 숨기는 법에 익숙해집니다. 그러나 계약의 궤 안에 놓였던 말씀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돌판에 새겨진 문장이기를 멈추고 살과 피를 입어 우리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말씀은 이제 기억해야 할 규범이 아니라 살아내야 할 관계가 되었습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의 안전한 계산을 흔들며, 내가 애써 유지해 온 균형을 무너뜨리는
위험한 사랑이 되었습니다. 나는 묻습니다. 이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이미 닳고 해진 관계의 옷을 어떻게 다시 짜낼 수 있겠습니까? 말로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상대를 평가하는 이 손으로, 용서를 기도하면서도 기억 속에서는 죄목을 지우지 않는 이 마음으로 말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정답을 가르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방향을 살아낸 사람이었습니다. 높아지지 않는 쪽, 소유하지 않는 쪽,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쪽으로 몸을 옮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빠르지 않았고, 언제나 비켜서 있었으며, 늘 누군가의 그림자 아래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복음은 가장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관계의 현장은 늘 십자가의 길입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내가 옳을 가능성과 동시에 내가 틀릴 가능성까지 함께 끌어안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내 자아는 익숙한 옷을 꺼내 입습니다. 판단의 옷, 도덕의 옷,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바리사이의 단정한 옷입니다. 그 옷은 나를 보호해 주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나를 고립시킵니다. 상대의 상처를 이해하기보다 설명하려 들게 하고, 침묵을 함께 견디기보다 결론을 재촉하게 만듭니다. 그때 세상의 지혜는 말합니다. “네 마음부터 지켜라.” 그러나 육화된 말씀은 피 묻은 손으로 조용히 대답하십니다. “사랑은 늘 먼저 자신을 내어준다.”
프란치스코가 나병 환자의 손을 잡았을 때, 그는 용감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을 지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상처를 덧칠하지 않았고, 악취를 설명하지 않았으며, 그저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관계의 치유는 언제나 그렇게 시작됩니다. 해결이 아니라 현존으로 시작됩니다. 세상의 지혜는 우리를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누가 더 많이 가졌는지, 누가 더 인정받는지, 누가 더 효율적인지를 따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 안에서도 모르게 경쟁하게 됩니다. 더 성숙한 사람, 더 헌신적인 사람, 더 영적인 사람이라는 보이지 않는 계단 위에 서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지혜는 계단이 아니라 평지를 가리킵니다. 모두가 같은 땅 위에 서 있고, 누구도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며, 누구도 아래에서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더 나은 나’를 입증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부족한 나’를 인정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비로소 타인의 빛을 위협이 아니라 선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말씀은 평화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 도구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먼저 다가가라고 요구하고, 먼저 사과하라고 재촉하며, 먼저 손을 내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망설입니다. 내가 먼저 낮아지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칸의 평화는 패배의 결과가 아니라 자유의 열매입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기에 잃을 것도 없는 자유입니다. 자신을 지켜야 할 성이 없기에 문을 활짝 열 수 있는 용기입니다. 그 자유 안에서 말은 칼이 아니라 다리가 되고,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기다림이 됩니다.
모든 피조물은 형제자매입니다. 이 고백은 낭만이 아니라 생활 방식입니다. 땅을 함부로 쓰지 않고, 사람을 소모품처럼 대하지 않으며, 관계를 필요에 따라 버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버려진 것들 속에서도 여전히 하느님의 숨결이 흐르고 있음을 알아보는 눈입니다.
오, 육화된 말씀이여! 나를 안전한 신앙인이 아니라 위험한 사랑의 자리로 이끄소서. 나를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머무르는 사람으로 빚어 주소서. 내 안이 계약의 궤가 되어 말씀이 잠들지 않고 오늘도 숨 쉬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일상의 작고 반복되는 관계들 속에서 노래처럼 살게 하소서. 완벽하지 않지만 진실하게, 빠르지 않지만 멈추지 않게 살아가게 하소서.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가 십자가 위에서 하나로 만났듯, 나의 하루 또한 그 만남의 자리가 되게 하소서. 우리는 아픔으로 결속되는 십자가의 신비를 관계 안에서 경험하며 너와 피조물을 통하여 생명과 부활의 신비로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여기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