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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붉은 백합처럼

 

성녀 아가다의 축일에

관계의 상처를 안고 걷는 이들을 생각하며

 

성녀 아가다의 고향인 카타니아의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도 기도는 식지 않는 불꽃이었습니다. 몸은 부서지고 숨은 떨렸으나, 침묵은 꺼지지 않는 노래가 되어 하늘로 천천히 피어올랐습니다. 성녀 아가다의 붉은 증언은 비극의 끝이 아니라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 밭에 조용히 뿌려지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관계가 가장 아픈 날들에도 이 씨앗은 흙 속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말 한마디가 칼이 되고, 침묵마저 오해가 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자주 스스로를 책망합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이렇게 되었을 거라고. 그러나 많은 상처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너무 진실했기에 남은 멍입니다. 관계의 겨울 속에 사는 이들이여! 우리 중에 누군가가 지금 관계의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있다면, 하느님은 그 자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프란치스코가 그러했듯, 하느님은 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십니다. 상처를 당장 꿰매라 재촉하지 않으시고, 먼저 그 옆에 앉아 당신의 떨림을 함께 견디십니다.

 

성녀의 피가 복음의 씨앗이 되었듯, 관계 안에서 흘린 눈물 또한 헛되지 않습니다. 이해받지 못한 채 삼킨 말들, 먼저 고개를 숙이며 흘린 자존심, 끝내 건네지 못한 사과와 용서의 숨결들,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제단 위에 올려진 하루하루의 봉헌이었습니다.

 

프란치스칸들이 걷는 길은 상처를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상처를 끌어안는 법을 배우는 여정입니다. 상대가 변하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작아지는 선택, 옳음을 증명하기보다 관계를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가난. 이 가난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때로는 사과해야 할 사람이 내가 아님을 알면서도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할 날이 옵니다. 그것은 정의의 포기가 아니라 정의보다 더 깊은 자비의 강물에 발을 담그는 일입니다. 성프란치스코가 맨발로 걸었던 길 위에는 늘 이 강물이 흘렀고, 성녀 아가다가 침묵으로 건넌 증언 속에도 이 물소리가 숨 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지금 말없이 관계를 견디고 있다면 그 침묵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더 이상 상대를 소유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하느님께 관계를 맡겨드리는 가장 깊은 신뢰의 기도입니다. 그 침묵 속에서 하느님은 이미 일하고 계십니다. 관계가 무너졌다고 느껴질 때, 하느님은 서둘러 새 관계를 주지 않으십니다. 대신 당신 안에 혼자서도 무너지지 않는 고요를 먼저 빚으십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아도 당신이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압니다. 관계는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무대가 아니라 이미 사랑받는 존재가 사랑을 흘려보내는 통로임을.

 

도구로 사는 삶은 상대의 반응에 따라 빛나거나 어두워지지 않습니다. 흐르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성녀 아가다의 붉은 백합은 피로 피었으나, 프란치스칸의 백합은 작음과 가난 속에서 피어납니다. 둘은 다른 꽃이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난 형제의 꽃입니다. 하나는 순교의 자리에서, 하나는 일상의 관계 안에서 같은 복음을 증언합니다.

 

지금 당신의 관계가 겨울이라면 그 겨울을 부정하지 마십시오. 눈 아래에서 뿌리는 이미 자라고 있습니다. 말없이, 드러나지 않게, 하느님만 아시는 깊이로 생명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관계 안에서 지친 이여, 당신이 지금 이끼처럼 말없이 버티고 있다면 그 삶을 하찮게 여기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 무너지는 벽이 아니라 지탱하는 벽입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침묵 덕분에 아직 기대어 설 수 있고, 누군가는 당신의 낮아짐 덕분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관계가 다시 피어나든, 끝내 피어나지 않든 당신은 이미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이 바로 낮은 자리에서 신의 제단 위에 드려진 봉헌이며, 붉은 백합과 가난한 형제들이 함께 부르는 하느님의 위로입니다.

 

낮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찬가

당신은 선, 모든 선이시며 지상의 선이십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신 채 모든 것을 살리시는 분, 붙잡지 않으시기에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선이십니다. 찬미받으소서! 이름 없는 아침의 빛으로 먼저 와 계신 당신, 우리의 공로보다 앞서 이미 사랑이신 선이여. 찬미받으소서! 형제 태양의 따뜻함 안에서, 자매 달의 고요한 인내 안에서, 당신은 크지 않게, 그러나 빠짐없이 만물을 먹이시는 선이십니다. 찬미받으소서! 상처 입은 관계의 틈에서도 아직 떠나지 않으시는 당신, 말이 다 사라진 자리에서 침묵으로 머무시는 선이여. 당신은 이기지 않아도 되는 선, 증명하지 않아도 빛나는 선, 잃어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선이십니다.

 

성프란치스코가 가난을 찬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난이 목표여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 안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작음이 복된 까닭은 그곳에 당신의 숨결이 가장 잘 들리기 때문입니다. 찬미받으소서! 정의보다 앞서 흐르는 자비로, 옳음보다 오래 남는 관계로, 사과와 용서 사이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선으로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당신. “당신은 선, 모든 선, 지상의 선.”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 덜 상처 주고, 조금 더 기다릴 수 있다면 그 또한 당신의 선이 우리 안에서 작게 일하신 결과입니다. 찬미받으소서! 승리의 노래가 아니라 버텨낸 노래로, 화려한 언어가 아니라 남아 있음의 몸짓으로 당신을 드러내는 이들의 삶 안에서. 마침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당신은 이미 충분하다 말씀하시는 선, 우리를 당신의 기쁨 안에 조용히 안으시는 선이여. “당신은 선, 모든 선, 지상의 선.” 이 노래가 말이 아닌 삶으로 계속 불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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