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코의 여섯가지 덕행에 대한 묵상
성 프란치스코가 모든 덕행에 드린 찬미의 노래인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는 가난과 겸손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그의 영성이 응축된 아름다운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는 단순히 덕행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각 덕행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우리 안의 이기심과 죄의 유혹을 몰아내는지를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
거룩한 여왕이신 지혜여, 주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자매인 거룩하고 순수한 단순함과 함께 당신을 구원하시기를 빕니다. 거룩한 부인인 가난이여, 주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자매인 거룩한 겸손과 함께 당신을 구원하시기를 빕니다. 거룩한 부인인 사랑이여, 주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자매인 거룩한 순종과 함께 당신을 구원하시기를 빕니다. 지극히 거룩한 덕행들이여, 주님으로부터 오고 흘러나오는 당신들 모두를 주님께서 구원하시기를 빕니다. 누구든지 하나를 소유하고 다른 것들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며, 하나라도 거스르는 자는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이요 모든 것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거룩한 지혜는 사탄과 그 악의를 부끄럽게 합니다. 거룩하고 순수한 단순함은 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육의 지혜를 부끄럽게 합니다. 거룩한 가난은 탐욕과 인색과 이 세상의 걱정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거룩한 겸손은 교만과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부끄럽게 합니다. 거룩한 사랑은 모든 마귀의 유혹과 육적인 유혹과 모든 육적인 두려움을 부끄럽게 합니다. 거룩한 순종은 모든 육적이고 이기적인 의지를 부끄럽게 합니다.
성프란치스코의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를 우리 일상의 관계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이는 마음의 결을 따라 내면에서 움직이는 이 움직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관계 안에서 우리는 보통 말, 태도, 선택을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덕은 그보다 훨씬 앞에서 시작됩니다. 아직 말하지 않았고 아직 행동하지도 않았지만 이미 마음 한구석이 미세하게 굳어지거나, 열리거나 하는 순간. 그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우리는 늘 “나중”에 덕을 실천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방향은 이미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관계에서 가장 깊은 층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내면의 움직임은 분노도, 판단도 아닌 두려움입니다. 내가 무시당할까 봐, 내가 상처받을까 봐, 내가 이용당할까 봐, 내가 약해 보일까 봐, 이 두려움은 대개 아주 조용히 시작됩니다. 가슴이 약간 조여 오거나, 몸이 살짝 앞으로 기울거나, 말을 준비하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이때 우리는 아직 죄도 아니고 덕도 아닙니다. 다만 방어의 문턱에 서 있을 뿐입니다. 덕은 이 문턱을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거룩한 지혜는 두려움을 없애지 않고 두려움 앞에서 나를 급히 구하지 않는 힘입니다. 지혜는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사람은 두려움을 더 빨리 감지합니다. 차이는 이것입니다. 두려움이 올라왔을 때 즉시 나를 보호하려 들지 않는 것. 변명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속으로 이미 상대를 밀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말합니다. “아직은 반응할 시간이 아니다.” 이 멈춤의 공간에서 단순함이 숨을 쉽니다.
단순함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먼저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우리는 상대를 보기 전에 이미 이야기를 만듭니다. “저 사람은 늘 그렇지.” “이번에도 분명 나를 공격하려는 거야.” “나는 또 이해해야 하는 입장이겠지.” 단순함은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기 전에 이 이야기들을 잠시 중단하는 태도입니다. 단순함은 묻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모른다.” 이 ‘모름’을 견디는 동안 가난이 문을 엽니다.
가난은 관계 안에서 ‘내가 얻어야 할 몫’이 있다는 전제를 내려놓는 자리입니다. 가장 깊은 갈등은 대개 이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이만큼 했는데…” “이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나…” “왜 늘 나만 양보해야 하지…” 이 생각은 정당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관계로부터 무언가를 보상받고 보장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거룩한 가난은 이 마음을 억누르지 않습니다. 다만 정직하게 바라봅니다. ‘아, 지금 나는 관계에서 대가를 원하고 있구나.’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겸손이 가능해집니다.
겸손은 내 상처를 진리로 착각하지 않는 용기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곧바로 도덕적 우위로 바끕니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저 사람은 왜 저래?” 겸손은 상처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 상처를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겸손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상처받았지만, 그것이 곧 내가 옳다는 증거는 아니다.’ 이 태도가 생길 때 사랑은 비로소 왜곡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살리기 전에 내 안의 ‘통제 욕구’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사랑은 종종 상대를 바꾸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위장합니다. “저 사람을 위해서 말해주는 거야.” “이게 다 사랑이니까.” 그러나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그 아래에는 상황을 내가 관리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숨어 있습니다. 거룩한 사랑은 상대를 설득하기 전에 내가 주도권을 쥐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사랑은 결과를 보장받지 않고도 관계를 떠나지 않는 선택입니다. 이 선택이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순종은 상대의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선이 지금 여기서 어떻게 흐르고 있는가’를 신뢰하는 일입니다. 순종은 누군가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굴종입니다. 거룩한 순종은 이 질문 앞에 나를 세웁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자아를 통과하지 않고 흐르고자 하는 선이 있는가?’ 그리고 그 선이 나의 자존심을 건너뛰어야 한다면 기꺼이 비켜서는 일입니다.
하나의 덕을 산다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움직임을 속이지 않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말한 “하나를 소유하면 모두를 소유한다”는 말은 이것을 뜻합니다. 두려움을 알아차리고, 판단을 유예하고, 욕구를 인정하고, 상처를 절대화하지 않고 통제를 내려놓고 선의 흐름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방향입니다. 덕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이 방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반복입니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우리의 관계는 조금씩 덜 상처 주고, 조금씩 더 숨 쉴 수 있는 자리가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