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성지순례를 마치는 날
리에티의 아침 여명은
저마다의 고유한 색을 드러내며
하루의 문을 엽니다.
호텔 앞 우산소나무 네 그루가
흐린 하늘 아래 고요히 서 있고
도시는 아직 말없이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가을은 점점 깊어지고,
우리의 인생 또한 그 계절을 닮아
천천히 익어갑니다.
순례의 마지막 날,
좋은 날씨와
알맞은 온도로
우리를 보살펴 주신
아버지의 부드럽고 다정한 손길이
조용히 가슴을 적십니다.
우주 안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듯
우리 또한 도구적 존재로
그분의 손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사라진 들녘 위에는
이미 풍성한 열매들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참된 중심은 언제나
나 바깥에 계심을
순례의 길에서 다시 배웠습니다.
성지의 순례길에서
이제 관계의 순례로 돌아갑니다.
오늘도
조용히,
깊이,
그분의
말씀을 잉태하여
관계 안에
선을 낳았으면 좋겠습니다.
10. 한국에 돌아와서
좋으신 주님께서 함께해주시고
형제자매님들의 따뜻한 마음에 힘입어
순례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쾌청하고 온화한 날씨와 더불어
서로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순례는
기쁨과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아픈 허리를 두 개의 스틱에 의지하여
걸었던 시간이 꿈만 같습니다.
제 인생의 마지막 순례라고 생각하니
사부님의 숨결과 흔적들이
진하게 전해왔습니다.
프란치스칸 삶의
경험된 지식을 공유하고
객관적인 자기 성찰을 도우려고
강의와 친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안전하고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마음으로 함께 해주신
형제자매님들과
기도로 도와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