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과 갈망이 만나는 곳에 신성한 실재가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주십니다.”
(로마 8,26).
우리 안에서 든든한 기초로 삼을 만한 것을 먼저 찾지 않고서는 어떠한 영적 건물도 세울수가 없습니다. 내가 든든한 기초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신성한 실재를 향하는 능력이 커지면 내 속의 하느님이 하느님을 찾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이 만물 안에 있는 하느님을 이미 알고 사랑하고 섬기신다고 느끼며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음을 그렇게 알게 됩니다. 만물 안에 있는 하느님께서 나의 비천함을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의 활동을 간직한 사람은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이며 관상을 통해 그분을 느낍니다. 그분은 나의 가장 깊은 주체와 당신의 자아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은 내가 그분을 찾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나를 찾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나를 찾으실 때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하느님의 갈망과 나의 갈망이 만나는 거기에 신성한 실재가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너 어디 있느냐? 너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세속적 권력과 그 권력이 힘으로 삼는 돈과 쾌락, 그리고 인정과 칭찬,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는 듣기 좋은 평가, 이를 기초로 지배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데 사람과 하느님까지도 이용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도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 중재의 기도와 희생을 셈하면서 바치는 것에 구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이 바치면 많이 받고 적게 바치면 적게 받으며 바치지 않으면 안 주시는 하느님으로 만듭니다. 많이 바치는 것으로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긍정한다면 우리의 가짜 이미지를 빨리 청산해야 합니다. 가짜는 진짜처럼 변장을 잘합니다. 내적으로 가난하지 않으면 가짜를 식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도덕적 성취와 인과응보로 철저하게 살아온 날들이 변화를 두려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에게서 내가 해방되는 자유, 하느님 안에 있는 나, 선을 식별하는 능력, 영의 활동을 보는 능력은 내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경험합니다. 따른다는 것은 말씀에 굴복하는 일이고 말씀에 굴복한다는 것은 도구적 존재로 나의 자유를 내어드리는 일로 시작됩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나를 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로써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일상의 관계입니다. 내 안에 내재하는 신성은 그렇게 관계 안에 흐르는 선으로 표현됩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로마 11,36)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골로 1,16) 하느님 없는 나와, 나 없는 하느님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없는 나는 나밖에 모르는 나로서 이기적이고 탐욕스럽습니다.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 (성프란치스코 권고 2)으로 하느님과 사람을 이용 대상으로 여기며 아쉬울 때만 하느님을 찾습니다. 또한 나 없는 하느님은 공허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와 친밀한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공허를 실존적 공허라고 부릅니다. 외롭고 우울하고 자기가 만든 감옥에 갇혀 삽니다. 인간은 실존적 공허를 메우기 위해 행위 동시적 만족을 추구하다 결국 죄의 어둠 속에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그분의 부활하신 몸은 신성과 인성을 한 그릇에 담고 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 믿음의 여정도 창조 때 받은 우리 자신의 신성한 하느님의 DNA를 찾는 길고도 험난한 인생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은 무상의 선물을 받아들고 나를 내어주는 하루가 되어야 합니다. 그 하루하루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지니고 산다면 죽음이 찾아올 때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삶은 없을 것입니다. “길에서 길을 만나 길이 되어가는” 우리의 삶은 그렇게 하느님으로 시작하고 하느님 안에서 마치게 됩니다. 갈망과 갈망이 만나는 곳은 우리의 관계이며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선에 참여하는 놀라운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성한 실재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