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가끔 언론의 허풍스러운 표현들에 불쾌할 때가 꽤 있습니다.
왜냐면 ‘세기적인 결혼’이니 ‘세기적인 사건’이니 하는데
별것 아닌 것에 엄청난 의미를 갖다 붙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울의 전도(轉倒)야말로 이런 표현이 어울리고,
그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마땅한 사건일 겁니다.
세기적 사건 정도를 넘어 ‘전 세기적 사건’ 또는 ‘인류사적 사건’이라고.
그러나 제 생각에 이 표현도 부족합니다.
아니 부족하다기보다 적당하지 않습니다.
사울의 전도, 이 사건은 사울에게 일어난 사건 정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이고 구세사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불교적으로 바꿔 얘기하면 돈오(頓悟)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점수(漸修)와 비교되는 것으로서 점수가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
점진적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데 비해 단박에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사울의 전도 사건은 이런 돈오 사건이 아니고 그 이상입니다.
사울이 고꾸라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고꾸라트리신 것이기 때문이고,
사울이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회개를 이야기하면서
주님께서 자기에게 회개를 시작하게 해주셨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회개에 있어서 주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회개는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입니다.
사실 스스로 변하는 것은 강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힘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이 떨어지면 그 동력도 떨어지겠지요.
그러나 주님의 힘에 의한 변화는 그렇지 않지요.
그 동력이 계속 유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사울이 박해자에서 주님의 그릇이 되고 사도가 된 것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개입과 역사하심으로 된 것이기에
바오로는 그 어떤 사도보다도 강력한 은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그렇습니다.
사울은 주님께서 선택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그 사람은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하는데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 선택받았을 뿐 아니라 그릇이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때 그릇이 크다는 것은 인간적인 의미 이상이지요.
인간적으로 그릇이 크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품이 크다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다시 말해서 꿈과 비전이 크다는 뜻이지만
바오로 사도의 경우는 은총의 그릇이 큰 것이고 고난의 잔이 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주겠다.”
결국 주님은 당신을 위해 고난을 많이 받아야 하기에 은총도 많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으면 고난이 많다는 것은 은총도 많이 주신 것이 되는 걸까요?
그렇게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을 텐데
전자는 믿음이 깊은 사람이고 후자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