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활 제2주일의 주제를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잡을 수도 있지만
올해 저는 <닫힘과 열림>으로 잡아봤습니다.
오늘 복음의 첫 문장은 제자들의 두려움과 문을 닫음에 대한 묘사입니다.
“주간 첫날 저녁,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닫아걸었다고 얘기하지만
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제자들이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보다 자기들의 힘이 없어서 그들을 두려워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호랑이가 무서워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물리칠 힘이 있거나 총이 있으면 두렵지 않지요.
우리는 이렇게 두려움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아내야 물리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한 것이
실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해석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두려워한 것이지만
이는 신앙이 빠진 인간적인 해석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이들이 유다인들을 두려워했겠습니까?
어렸을 때의 우리는 밤이 무섭고 강도가 무서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아버지가 함께 있거나 강아지만 옆에 있어도 무섭지 않은 경험이 있잖아요?
이는 우리가 어두운 것은 밤이 어둡고 세상이 어둡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빛이요 세상의 빛이신 주님께서 안 계시기 때문이라고
우리가 신앙적으로 이해함과 같은 논리입니다.
우리에게 평화 없음도 같은 논리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겼기에 또는 싸움을 걸어오는 누가 있기에
평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주님의 평화가 없기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평화로우려면 오늘 제자들에게 평화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평화를 주실 때 그 평화를 받아 지니면 우리는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평화를 무고(無故)의 평화가 아니라 관계의 평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간 또는 밤새 별고(別故) 없으셨느냐고 인사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때의 별고란 특별히 안 좋은 일 곧 사고의 준말일 것입니다.
그러니 별고 없냐는 말은 특별히 안 좋은 일 사고 없었냐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 좋은 일이 있고 상황은 평화롭지 않아도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평화롭습니다.
제자들이 호수를 건너는데 거센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배의 고물을 베고 주무십니다.
제자들은 난리법석인데 주님은 천하태평이십니다.
이렇게 평화의 주님께서 배에 함께 계시면 제자들은 평화롭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함께 계시어 두려움은 사라지고 평화롭게 되면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골방에 갇혀 있지 않고
닫힌 문을 활짝 열고 나가고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하느님께서 주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리고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하시면서.
그래서 제자들은 성령 충만하게 되고,
성령 충만함으로 사랑 충만하게 되고,
사랑 충만함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며,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 공동체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는,
무소유와 공동소유의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문이 열린 것뿐 아니라 성령의 사랑으로
마음도 열리고 움켜쥐었던 손도 펴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나와 우리 공동체에도 이런 부활의 은총을 주시길 청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