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3월 16일 토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요한 7,46)
권능있는 예수님의 말씀
유대인들이 구원자의 말씀에 넘어갈까 봐 걱정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붙잡아 오도록 성전 경비병들을 보냈습니다. 그리스도를 가두어 놓으면 더 이상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에게 일어날까 걱정 하던 일이 예수님을 잡아 오라고 그들이 보낸 이들에게 일어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성전 경비병들이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몸서리칩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라는 말이었지요. 성전 경비병들의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을 붙잡아 오지 못한 것을 두고 우리를 탓한다면 말이 안됩니다. 거룩한 힘이 담긴 말씀을 하는 분을 우리가 어떻게 붙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분은 인간처럼 말씀하시지도 않았고 인간들이 할 만한 말씀을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 말씀들은 본성상 하느님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들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존재는 생명보다 크다. 그것은 생명과 지식의 토대다. 그것은 내세에서도 계속된다. 순교자들은 죽어서 목숨을 잃었지만, 존재를 얻었다. 우리의 생명은 죽게 마련이지만, 우리의 존재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존재가 하느님과 가깝기 때문이고, 하느님이 산 자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생명이다”라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하느님이 보기에는 어느 것도 죽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살아 있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존재야말로 하느님의 가장 독특한 현존이라고 말한다. 이는 존재가 창조주 특유의 것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생명이 죽는 것이지 존재가 죽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만이 존재를 죽일 수 있다.(137)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3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18-22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교의 유일신 신앙과 '믿음의 다섯 기둥'
이상의 다섯 기지 특징은 이슬람교가 지닌 유일신 신앙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무하마드는 이슬람교를 알라의 절대적 자기 계시에 근거하여 모든 예언과 종교가 완결적으로 정화된 형태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는 야훼 종교의 창립자인 모세나 그리스도교 창립자인 예수를 모두 예언자의 영적 산맥 줄기에서 솟구친 영적 고봉(高峰)들이라고 무슬림은 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하미드는 진정한 유일신 신앙의 역사적 계보를 찾아 올라가 마침내 아브라함에 이른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처음엔 자녀를 잉태하지 못하므로 여종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의 계보를 이어 아랍인들의 혈통과 신앙이 지속되어 왔다고 역사적 신학의 눈으로 성경 해석을 하는 것이다.(창세기 16장 참조)
아브라함에서 이스마엘로 이어지는 계보를 중시하고, 아브라함의 신앙이 참되고 순수한 유일신 신앙의 시발점이었다고 보는 이슬람교의 성경 해석은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성경 해석학과 물론 큰 차이를 보인다
이슬람교 성지 순례 과정에서 순례의 클라이맥스가 되는 메카의 '카바'(Kaaba) 성소 창립자를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에게서 그 시발점을 찾는 무슬림의 통속 신앙은 역사적 확실성이 없다.(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