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사야서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시온에게
하느님께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라고 대답하고,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다시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런 엇박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은 사랑하셨다고 하는데 인간은 그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고,
하느님은 은혜의 때에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의 날에 도와주셨다고 하는데
인간은 그 은혜를 받은 적이 없고 그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온만 이런 것이 아니고 사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은 이렇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 고통일 뿐이고,
고통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그 은혜를 그때는 느끼지 못하여 버림받았다고
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은혜로 느끼곤 합니다.
사랑과 고통의 불일치요 때의 불일치인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이런 우리 인간의 불일치와 달리
아버지 하느님과 당신 사이의 일치를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주님 친히 이렇게 정답을 말씀해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관상적 믿음이고, 믿음의 관상 때문입니다.
먼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런 믿음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는 관상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은 다 사랑이라는 믿음이 있고,
그래서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 벌어져도 그것이 바로 은총임을 봅니다.
그리고 벌어진 일들과 그 일을 벌인 인간들을 볼 때
그것들에 의해 현혹되지 않는 하느님 관상을 하기에
그것들로 인해 실망이나 절망이나 포기를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 생명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여태 사랑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여태 사랑입니다.
여태 사랑은 중단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여태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좌절감이나 절망감 때문에 중단치 않는 사랑입니다.
내 사랑을 배신하는 그 인간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