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3월 13일 수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요한 5,26)
생명이 생명을 낳다
이 말씀은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는 증언입니다. 살아 계신 아드님이 살아 계신 아버지에게서 나셨다면, 그 탄생은 새로운 본성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 탄생입니다. 살아 있는 존재가 살아 있는 존재를 낳을 때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탄생하기 위해 무존재가 생명을 추구하여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에게서 탄생하는 생명은 무엇이든 (본성의 일치로 인하여,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완전한 탄생
이라는 신비스러운 사건으로 인하여) 살아 계시며 살아 있는 이들의 생명을 당신 안에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삽니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에 대해 말하자면 시간이 모자라겠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나라를 정복했고 정의를 실천했으며 약속된 것을 얻었고 ... 약한 데서 힘을 얻었고 전쟁 중에 강해졌고 외국인들의 진지를 무너뜨렸습니다. 여인들은 부활에 의해 죽은 식구들을 다시 얻었습니다. 그러나 더러는 더 나은 부활을 얻기 위해 석방을 거부하고 고문을 받았습니다. 또 더러는 조롱과 매의 시련을 겪고, 심지어 결박과 투옥의 시련도 겪었습니다. 돌에 맞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찔려 죽었으며, 양가죽과 염소가죽을 두르고 돌아다녔고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었습니다.
세상이 마뜩찮아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 다녔습니다 ... 이렇게 구름처럼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모든 짐과 옭아매는 죄를 떨쳐 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참을성있게 해 냅시다. … 여러분은 아직 피를 흘리면서까지 죄와 맞싸우지는 않았습니다(히브 11,32-38; 12,1.4)(135)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3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18-22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3절: 1054년의 동방 대이교
그리스적 • 동방적 사고와 라틴적 • 서방적인 사고는 벌써 오래전부터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 대립은 전례적이고 규율적인 것이었으며, 교회정치적이고 교의적인 것이었다. 카를 대제와 오토 대제하에서 서구 황제권의 성취, 성화상 논쟁, 이탈리아에서 - 라벤나와 남부 이탈리아 - 비잔탄인들의 영토 요구, 이탈리아로 프랑크족의 팽창 등은 긴장을 더하였다. 개혁으로 인해 새로운 자아의식으로 각성된 서구의 교회의식 또한 이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독일인 교황인 레오 9세가 정치적으로 노르만인들이 비잔탄인에게서 빼앗기 시작한 남부 이탈리아로 뻗으려 하였을 때, 접촉점과 차이점이 새롭게 판명되었다.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와 그의 남부 이탈리아 총독 아르기로스는 교황과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노르만인들과 싸는 데 마음이 쏠려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미카엘 체룰라리오스(1043∼1058)는 교황이 자신의 재치권 영역에 간섭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적인 대립들을 크게 공공연히 문제시함으로써 그 접근을 방해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라틴계 교회와 수도원을 폐쇄하고, 미사에서 누룩 없는 빵의 사용, 사제의 독신제, 필리오퀘(Filioque: …와 성자에게서)를 사도신경에 채택한 것 등 라틴 교회의 관습들에 대한 신랄한 비난은 그의 투쟁방법이었다.
레오 교황은 한편으로는 동맹협상을 추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총대주교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하여 실바 간디다의 홈베르트 추기경과 자기의 상서 원장인 로트링겐의 프리드리히, 그리고 아말피의 베드로 대주교를 사절단으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였다. 특히 전자 두 명은 로트링겐의 귀족 출신으로 개혁의 열렬한 웅호자였다.(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