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곳에 있는 벳자타 못가에는
병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38년이라는 숫자는
구약 성경에서 온다고 학자들은 말하는데
신명기의 어느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면서
광야 생활의 기간을 38년이라고 말합니다.
즉 요한복음은
이 사람의 투병 기간을 38년이라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그를 지목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그 질문에 병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치유되지 못한 것을
상황이 좋지 않은 탓으로 돌립니다.
병자가 치유를 원한다고
분명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야기의 결론은
다른 이야기와 좀 다릅니다.
이 병자는
자기를 치유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리고
그것을 계기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야기의 결론이 다른 이야기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의 표징 이야기는 대부분
믿음으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오늘의 이야기는
믿음이 아니라 고발처럼 보입니다.
그것도
자기를 치유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더 그렇게 합니다.
치유 이야기는 사실이겠지만
요한복음은 38년이라는 숫자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꼬집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또한 우리에게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되는데
남의 탓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립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이
꼭 내가 무엇인가 잘못해서
내가 무엇인가 하지 않아서
건강하지 않은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다보니
나의 필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주위 상황을 보고 싶고
예수님의 시선을 내가 아니라 주위 상황으로
돌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것은
감사함으로 남지 않고
믿음으로 연결되지 못합니다.
물론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이
죄를 지어 나쁜 일이 벌어졌다는 것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요한 9장과 연결해서 보면
병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는 질문에서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최대한 단순하게 이해하고
'네 건강해지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나의 잘못으로 병을 얻은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드러날 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오히려 우리의 삶은
감사와 기쁨으로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