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자신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는지
궁금해합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단식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 관점에서 이 질문을 바꾸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는데
너희는 왜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이 질문은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게 들립니다.
우선 질문의 중심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며
신앙 생활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신앙 생활에 집중하기 보다는
너의 신앙 생활에 참견하고 싶습니다.
노력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보다는
노력하지 않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너는 그렇지 못하다고 단정짓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겸손해질텐데
오히려 콧대만 높아집니다.
즉 나 스스로 나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단식도 많이 하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도 많이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은 공동체적입니다.
서로 이끌어 주고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다보면 옆 사람의 모습도 보이고
그것에 대해 해 주고 싶은 말도 생깁니다.
단식하지 않는 것에
단식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냐고
제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도와주어
단식을 할 수 있게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안을 할 때
나는 상대방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먼저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힘든데 억지로 하고 있는 것을
제안하다보면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심판하는 것처럼
표현하기 쉽습니다.
반면 쉽지 않지만 기꺼이 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그 안에서 좋은 의미를 찾고 있다면
하지 않는 사람에게
동참을 권유할 수 있습니다.
권유는 그가 기꺼이 내 말을 듣지 않아도
기분 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의 제안은 어떤 방식인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