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2024년 2월 4일 연중 5주일
고 도미니코 ofm
오늘 독서와 복음과 관련하여 고통과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제 1독서에서 욥의 고통은 인간 고통의 본질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고통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 고통에 담겨진 하느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시며 당신과 일치하시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식함으로써 고통을 견뎌내다보면 인내를 낳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굳건해 집니다.
우리는 기쁘게 받아들인 그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분은 고통속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열어주며 이 길을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십자가 고통의 신비로 이끄십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함께 할 때 그 고통은 더 이상 고통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을 때에는 고통이 매우 적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기심에 의해 야기된 고통으로부터 분노와 원망, 자기연민, 신랄함, 절망에 의해 야기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주 행복한 사람으로서 참되고 완전한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안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세상의 조류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는 성 치쁘리아노가 얘기한 일상의 순교를 사는 것입니다. 특히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고통의 본질을 바라보게 될 때 기도하게 됩니다.
무엇보다고 기도는 은총입니다. 그 은총은 시작이요 수단 방법이며 마침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말이 많을 때가 아니라 ‘나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정말 괴롭습니다 왜 이렇게도 침묵하고 계십니까?’ 하고 하느님께 호소할 때 시작됩니다. 하느님을 그리워 하는 갈망이 마음안에 있게 될 때 기도는 시작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 자체가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는 마음을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고 단순하고 순수하고 솔직하게 합니다. 우리의 문제와 상처를 해결하기 위한 참된 치료법은 기도라는 것을 성인들의 기도체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항구히 기도할 때 우리 생활은 점차 순수해져가고 거룩해지며 올바르게 되며 생활에 영적 리듬이 생깁니다. 기도의 가장 큰 기적은 기도하는 영혼의 마음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차적으로 하느님께 향해지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많은 인내를 필요 합니다. 기도는 한 영혼이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로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하나의 의무이면서 신앙의 본질이며 사랑의 행위이며 복음의 증거입니다.
바로 이런 기도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다른 이의 고통을 사랑으로 함께 할 때 그곳에 참된 복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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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2월 1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요한 14-18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거룩한 성체 속에 나타난 지극히 성스러운 얼굴
뤼뇽군도(인도양 -1902년)
많은 어른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진기한 일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잠시 동안 성체께 조배드리자 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이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적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중앙제대 가까이로 몰려들었다. 또한 특별한 것은 그리스도의 이 현현을 성광의 뒷쪽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성광의 전후좌우에서 사람들은 이 구세주의 얼굴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전등불을 끄고, 또 촛불도 꺼서 성당 안이 더욱 더 어두워질수록 그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은 보다 더 찬연히 빛이 났다.
시장(市長)도 두 딸과 함께 성당에 와서 이 기적을 목격하였다. 심지어 이 기적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하여 확대경을 가지고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대 주위만을 크게 볼 수 있었을 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오히려 눈으로 그냥 보는 것보다 더 잘 보이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것은 호기심에서 몰려온 섬 원주민들까지도 예외없이 그 기적의 현현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단지 성당에 들어 서기만하면 제대에 모셔진 주 하느님의 모습이 이미 그들에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대략 만 명 정도가 주 예수를 경배하는 축제일에 성 안드레아스 성당에 왔다. 수백 명의 사람
들이 서명으로써 이 사건의 진실성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 기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톨릭에 대해 커다란 공감을 갖도록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결사대는,
“그 모든 것은 전적으로 교회가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불만을 갖고 있는 성직자들의 책략이다”라는 말을 퍼뜨림으로써 이런 좋은 영향을 깨뜨리려고 하였다.
오후 2시경 성광에서 이상한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빛을 발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대신 또 다른 기적의 현현이 나타났다. 성체 한가운데에서 성체의 위아래로 2-3cm 가량씩 더 솟아나온 고귀한 십자가가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성당이 길어서 뒷좌석에 었던 눈병에 걸린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제단 위에 있는 어떤 것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오늘은 이 십자고상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성 안드레아스 성당의 이러한 성체의 현현은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고 사람들이 감사의 조배를 드리기 위하여 탄툼 에르고(Tantum ergo) 를 불렀을 때 사라졌다.
라콤 신부의 증언 이외에도 직접 목격한 다른 증인들의 수많은 증명서들이었으며, 그 증언은 모두 일치하였다. 또한 이 가운데는 비신자들도 성체의 기적을 입증한 경우가 여러 차례 있다.(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