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주 목요일-2014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이것은 하나의 기도다!”하고 뇌까렸습니다.
더 나아가 기도일 뿐 아니라 청원 기도의 본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 환자와 주님 간에 오간 대화는 진정 본보기로서 손색이 없지요.
왜 그런지 한 번 볼까요?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라고 하는데 이런 대화가 오가지요.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청원 기도를 할 때 이 나환자보다 더 완벽한 청원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자기의 청을 아뢰면서도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절실하고 간절하지만 품위를 잃지 않습니다.
나아가 이것은 청원기도라기보다는 신앙 고백이라고 함이 맞을 겁니다.
그것도 주님의 능력뿐 아니라 주님의 좋으심까지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가 어떻게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나병 환자도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믿을 수 있습니다.
허나 최악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좋으시다 할 수 있을까요?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악까지 간 사람이기에
그는 진정 하느님의 좋으심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정 최악까지 간 사람입니다.
잃을 게 더 없을 정도로 이 세상에서 모든 걸 잃었습니다.
하나하나 잃어갈 때마다 그는 절망하고 또 절망하였으며,
하나하나 잃어갈 때마다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잃을 것이 남았을 때는 불안하고
얼마 남지 않은 것마저 앗아가시는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는데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니 오히려 마음도 편안하고
어두운 밤에 별이 떠오르듯 도리어 선이 떠올랐습니다.
이것이 <최악의 선>입니다.
더 나쁠 것이 없는 악은 악이 아니고 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악은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며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더 좋은 것을 바라기에 현재의 것이 악이 되는 것이고요.
이렇게 최악의 상태에서 최악의 선을 발견한 사람은
이제 최악을 허락하신 최고선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최악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 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의 더 진실한 기도는 말에 있지 않고 동작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청하였다.”
무엇이 존재의 기도에 더 가까울까요?
입으로 하는 기도가 더 가까울까요?
동작 또는 행위로 하는 기도가 더 가까울까요?
제 생각에 당연히 동작과 행위가 더 존재적인 기도에 가깝습니다.
사실 나병 환자가 주님 앞에 나아온다는 것 자체가 존재적인 기도입니다.
우리도 모든 기도에 앞서 해야 할 것이 주님의 현존 앞에 현존하는 겁니다.
성당에 들어갈 때 그냥 성당에 들어간다고 생각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도 그냥 기도한다고 생각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왔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온 사람이라면
오늘 나병 환자처럼 겸손한 동작을 취할 것입니다.
제가 저희 수련자들에게 가끔 불만인 것이 성당에 들어와 털썩 앉는 겁니다.
하느님 앞에 나아온 사람이라면 오늘 나환자처럼 겸손하게 무릎을 꿇겠지요.
이렇게 나아온 나환자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
이 동작 하나에 나환자의 기도에 대한 주님의 모든 응답이 들어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