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오늘 복음에서 “생각을 바꾸어”를 묵상하다가 그 묵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도 있지만 생각이 바뀌는 것도 있지요.
생각뿐 아니라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마음이 바뀌기도 하고,
비슷한 뜻으로 관심이 바뀌기도 하고 관심을 바꾸기도 합니다.
겉모습 면에서도 모습이 바뀌기도 하고 모습을 바꾸기도 하는데
성형수술로 자기 모습을 바꾸기도 하고 살면서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이것에서 저것으로 되는 변화에는 바뀜과 바꿈 두 가지가 있는데
바꾸는 것이 능동적인 변화라면 바뀌는 것은 수동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생각에 이어 ‘Turning Point’라는 말도 떠올랐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누구에게나 있지요.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에게는 나환자와의 만남이 전환점이었지요.
이때를 전후하여 나환자를 만나는 것이 쓴맛에서 단맛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세속에 맛 들이고 살던 삶이 세속을 떠난 삶으로 바뀌었으며
그래서 프란치스코 스스로 이때부터 회개의 삶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에게 전환점이 사실은 이 사건 하나가 아닙니다.
첫 번째 전쟁에 나가 포로가 되고 감옥살이를 한 것이나,
그 후유증으로 병이 들어 죽다가 살아난 것이나,
회복 후 다시 전쟁터로 가다가 스뽈레또에서 환시를 본 것도 다 전환점이 됐지요,
그런데도 나환자의 만남이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고 그가 말하는 것은,
스스로는 시작도 못 할 회개를 주님께서 하게 해주셨다는 강렬한 체험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그러니까 능동적으로 회개의 삶을 삽니다.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회개의 삶을 삽니다.
욕망이나 불의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기 좋을 대로 하던 것을 하느님 원하시는 대로 하는데
어쩔 수 없이 또는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또 기쁘게 합니다.
우리가 바뀐다면 이렇게 바뀌어야 하고,
하느님께서 바뀌게 해주신 것을 이제는 스스로 그리고 기쁘게 살아가야 하는데
나는 바뀌기는 했는지 어떻게 바뀌었는지 오늘 독서와 복음은 돌아보게 합니다.
큰아들처럼 하느님 뜻을 적극 거부했으나 마음을 바꿔 적극 실천하는 나인지.
작은아들처럼 하느님 뜻은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관심이 없는 나는 아닌지,
또는 옛날에는 참 잘 살았는데 지금은 오히려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제는 어디 갔다 오다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한 30대 여성이 길을 가면서 길가의 쓰레기를 줍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부끄러워하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줍고 있었습니다.
즉시 저를 돌아보게 하였지요.
옛날에 저도 그렇게 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의 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길거리 청소하는 분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고,
그 많은 쓰레기를 어떻게 내가 다 줍겠냐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저는 좋게 바뀐 것이 아니라 나쁘게 바뀐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독서의 말씀이 저를 아프게 합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회개 곧 돌아서야 하는데
불의에서 정의로 돌아서지 않고 오히려 정의에서 불의로 돌아선 것은 아닌지,
주님께 돌아서야 하는데 나에게로 돌아서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저입니다.
저희 집 인터넷에 문제가 생겨
이곳 센터에 일찍 와 강론을 올리느라 늦어졌습니다.
그 사이 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문자들을 보내셨는데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강론을 못 올리거나 늦게 올리면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과 내일은 제가 강론을 올리지 못합니다.
인터넷이 없는 곳에 가기 때문입니다.
역시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어제 한가위 인사 드리지 못했는데
오늘이라도 한가위 인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