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오늘부터 우리 전례는 루카 복음을 읽는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신 곳이
당신의 고향, 나자렛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시작하여 나자렛으로 가신 것으로 복음은 얘기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고향에는 왜 가셨을까?
그리워서 가셨을까, 부모를 만나러 가셨을까, 아니면
가파르나움에서의 성공을 고향에서도 거두고, 그래서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인정을 받기 위해서 가셨을까?
만약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면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시는 분이 왜 가셨을까?
그런데 묵상을 하다 보니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가 제가
얼마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지를 보여주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설마 그런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이유로 고향을 방문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 저와 같이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분이셨다면
예언자는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함을 잘 아시면서
굳이 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타향과 고향을 가리지 않고
가야 할 당신의 행보를 계속하시는 겁니다.
당신이 오심으로 하늘나라가 누구에게나 가까이 왔음을,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오셨음을,
당신은 누구보다도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까이 오셨음을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하시지만 사람들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거나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고향 사람들은 요셉의 아들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고향 사람들의 첫 반응은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좋게 말하면서도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입니다.
요셉의 아들이 고향을 떠나 큰 인물이 되어 온 것까지는 좋지만
큰 인물 이상의 존재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인성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너무도 어려운 것이고,
특히 고향 사람들, 어렸을 때부터의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것이니
너무 나무랄 수도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고향 사람들을 보면서 나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뿐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신성이 숨어 있는데
나도 고향 사람들처럼 그것을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은 아닌지.
주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눈먼 이를 다시 보게 하는 분이신데
그 주님을 믿는다면서 아직도 나는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고 있고,
그래서 영적으로 보는 것은 실패하는 사람은 아닌지.
그러니 모든 사람 안에 그리고 모든 것 안에 숨어 있는 신성을 발견한다면
우리도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눈먼 사람에게는 당신 안에 계신 하느님을 나처럼 발견하라고 외칠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기쁘게 전하고,
영적 개안의 기쁨을 소리 높여 외치는 행복에로 초대받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