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말인데 이것은
하느님의 엄청난 차별이고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 되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어지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들”이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감각이 불능상태이고 마비 상태인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하늘나라에 대한 감각이 불능이거나 마비 상태인 이유는,
저들에게는 영적인 감각이 없기 때문이고 이 세상 감각만 있기 때문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육신의 두 눈 외에 제삼의 눈으로 ‘Eye of Wisdom’
곧 ‘지혜의 눈’ 또는 ‘혜안’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을 일컬어
‘저 사람 참 혜안이 있다.’라고 흔히 얘기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불교의 혜안과 같이 영안에 관해 말씀하시고,
이 영안이 있어야 하늘나라의 신비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어떤 사람이 영적인 감각이 마비되고,
어떤 사람이 영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을 바꿔서 얘기하면 본다는 사람에게는 보여주시지 않고,
보여주십사고 청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며,
슬기롭다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저는 철부지여서 잘 모릅니다.’라고 하는 사람에겐 보여주신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실로 안다는 사람,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만 알 뿐,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음을 알지 못하고,
특히 하늘나라의 신비와 관련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은 정작 알아야 할 것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고,
사실 하늘나라 신비와 비교하면 몰라도 되는 것들뿐입니다.
몰라도 되는 세상 것은 잘 알고 잘 보지만
정작 봐야 할 하느님 나라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영적 감각을 살아나게 하고,
교만은 영적 감각을 마비되게 하는 것임을 겸손하게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