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도행전에서 주님께서는 바오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근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제게는 근심은 해도 되지만 두려워하는 것은 말라는 말씀으로,
그러니까 근심은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두려움은 나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실상 그렇습니다.
두려움은 좋을 것이 없지만,
근심은 오늘 주님 말씀처럼 기쁨이든 자녀든 뭔가를 낳는 창조적 근심도 있지요.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하지 말아야 하지만
근심스러운 일은 무조건 피할 것이 아닙니다.
생산적인 근심은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 감수해야겠지요.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두 상반된 부류가 있습니다.
근심이 떠나지 않는 사람과 근심은 아예 접근조차 못 하게 하려는 사람입니다.
근심이 떠나지 않는 사람은 사실 어제오늘의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니겠지만,
우울증과 같이 병증을 띄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요즘의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근심이 떠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엄마는 자식에 대한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가 그렇게 쓸데없는 근심 걱정하지 마시라고 해도
그 쓸데없는 근심과 걱정이 떠날 날이 없었고,
그러니 하시지 말라는 제 말이 어쩌면 쓸데없는 말이었지요.
그러므로 근심은 그 자체로 나쁘거나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니고,
기쁨으로 이어지지 않는 근심이 나쁘고,
사랑이 없어 병증일 뿐인 근심이 극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아이를 낳는 어미의 근심과 같은 근심은 많아져야지요.
요즘 아이를 낳는 고통과 키우는 고통이 싫거나 두려워
아이 대신 강아지를 키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근심은 사람에게서 많아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요즘의 더 큰 문제는 사랑은 없고 두려움은 커져
근심할 줄 모르고 근심은 접근조차 못 하게 하는 점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두려움의 대상이고,
그래서 고통을 줄 것 같으면 그리고 조금이라도 성가실 것 같으면
그런 일은 아예 거부하고 근심거리들은 애초에 싹둑 잘라버리지만,
그 바람에 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그에게는 아무런 기쁨도 없습니다.
아이 낳을 근심은
아이 낳을 고통을 감수한 창조적 사랑의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고,
아이를 얻는 기쁨을 알고 감히 도전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권입니다.
영적인 출산의 근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세상에 그리스도를 낳아줄
거룩한 일에 감히 도전하는 우리에게는 창조적인 근심을 어쩔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