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 에제키엘서는 두 번이나 ‘그제야’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야’가 그동안 그렇게 애썼는데 이뤄지지 않던 것이
이제 비로소 이뤄졌다는 과거적 표현이라면
‘그제야’는 한동안 애썼는데 이뤄지지 않은 점에선 ‘이제야’와 마찬가지지만
이뤄지는 시점이 지금이 아니라 미래 어느 시점인 미래적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나의 주인임을 이제라도 알게 되면 좋을 텐데
우리는 그렇게 알고자 애쓰는데도 지금 그것을 알지 못하고
세월이 흐르고 더 많은 과정을 겪은 뒤에야 알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과정입니까?
이에 대해 에제키엘서 스스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이라고.
그리고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겁니다.”
그리고 복음은 죽은 나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성령도 죽지 않게 하지 않으시고 죽은 다음에 살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나자로가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도
바로 가지 않으시고 이틀이나 더 있다가 그래서 나자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뒤에 나자로에게 가시고 다시 살리십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죽지 않을 수는 없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뜻이고
영원히 살려면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안 죽는 삶을 택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는 삶을 선택하셨으며,
그것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뜻이고,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는 되살아나고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나자로는 이 세상에서 다시 살아났지만
실은 이 세상에 다시 살아나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영원히 다시 살아나는 모든 인간 존재의 상징입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죽어야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사도들은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야,
그리고 성령을 받고 난 뒤에야 그제야 알게 되는데
그것은 사도들 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 무덤을 열고 우리를 꺼내주시는 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무에서 우리를 있게 하신 주님께서
무덤에서 우리를 나오게 하시는 것쯤은 너무도 쉬운 것임을 믿는 우리입니다.
그리고 나오라는 명령에 순명한 라자로처럼 우리도 무덤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