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3년 3월 26일 사순 제5주일
고 도미니코 ofm
질병과 거기에 따른 모든 고통은 동서고금 모든 사람에게 문제가 되어왔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세계관과 인생관에 따라 달라집니다. 고대 근동지방 사람들은 병을 악령들이 끼치는 재앙이나 경신 예식의 실수로 인해 잡신들이 보낸 재화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치유를 얻기 위해서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푸닥거리를 한다든가, 그들에게 빌고 제사를 올림으로써 용서를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의술은 사제들의 영역이었고 마술에 가까운 형태였습니다.
병을 통해서 인간을 지배하는 죽음의 세력이 나타나므로(1코린 11,28-32) 병이나 죽음은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구약 성서에서 질병은 인간을 채직찔 하시는 하느님의 행동이라고 보고 있습니다(시편 39,11-12), 이렇게 질병이 하느님께 달렸다고 하는 원칙 아래서, 그 병 속에서 인간은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들의 작용을 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바라시기에 질병은 다른 모든 인간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뜻과는 상반됩니다. 질병은 죄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왔고(창세 3,16-19), 죄인의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의 표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약에서 질병은 하느님의 백성이 불충실했기 때문에 주로 당해야만 했던 저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신명 28,21). 따라서 질병의 체험은 사람으로 하여금 좀더 깊은 죄의식을 갖도록 합니다. 인간은 병의 치유를 구할 때 마다 항상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시편 38,2-6).
하느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병에 걸렸을 때 우선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해야 합니다(집회 38,9-14). 찌르는 것도 하느님이요, 고쳐주시는 것도 하느님이십니다(신명 32,39). 하느님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훌륭한 의사이십니다.(탈출 15,26). 질병의 치유는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들을 굽어 살피셨다는 것을 말해주는 표지로서의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께서는 공생활 동안에 어디서나 환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질병에 관해서 편협한 응보론적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서도(요한 9,2-3 참조), 병을 죄의 결과로, 인간을 괴롭히는 악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사탄의 세력의 표징으로 보셨습니다(루카 13,16). 병자들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들어(마태 20,34), 그들을 위해 치유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자연적인 질병이나 귀신으로부터 오는 질병을 구태여 구별하지 않으시고 나쁜 영들을 쫓아내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마태 8,16; 마르 1,32; 루카 4,40). 자연적인 질병과 마귀들린 병의 치유는 결국 예수님의 권능을 드러냅니다. 이 둘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와 지상에 하느님나라의 건설을 의미합니다.
모든 병자들에게 주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신앙이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므로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9,28; 마르 5,36; 루카 8,50). 주님께 대한 믿음은 하느님나라에 대한 신앙을 내포하는데, 구원을 얻는 것도 바로 이 신앙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나라의 표징으로서 기적적인 치유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을 첫번째 파견하실 때 병을 고치는 당신의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마지막 파견에는 그들의 복음선포가 믿을 만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표징이 항상 뒤따르리라는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마르 16,17-18).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은 예수 부활의 실재성과 예수님의 이름의 권능을 드러낸 치유의 기적 사화를 여러 차례 소개합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여러가지 은사들 중의 하나로 치유의 은사를 들고 있습니다. 이런 표징은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여전히 활동하심을 보여 줌으로써 주님의 교회에 믿음의 가능성을 부여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여러 차례의 경험을 통해서 질병이 수난하시는 주님과 인간을 일치시켜 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환자에게 봉사하는 것은 고통을 받는 당신의 지체를 통해서 바로 주님께 봉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3월 4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27-28장 / 사도 1장
금주간 생태 행동
<생태 영성 주간>
생태 지향 :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프랑스 작가 샤또브리앙의 첫영성체
“말해보게, 자네는 어떤 죄를 지었기에 불안해하고 있지? 비밀로 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가?’”
저는 언제나 그분의 모든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신부님, 아니예요! “
그 후 저는 매번 고해실에서 나올 때마다 마치 방금 나쁜 죄를 범한 사람처럼 창백해지고 당혹해 하곤 했지요. 그래서 저는 저의 정직성에 대한 의심 때문에 고해신부님이 얼마나 근심하셨는가를 알았습니다. 맞습니다. 그분은 정확히 추측하고 계셨던 것이예요.
사실 저는 부끄러운 체면 때문에 저의 커다란 죄를 비밀로 감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부활절의 전주(前週) 수요일에 판공성사를 받으러 가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저의 첫영성체 전날이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철야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미리미리 준비했습니다. 또한 그때 저는 성서에 있는 정직하지 않은 고해에 대한 가르침을 읽고 정말 경악했습니다.
학생들이 부모님을 동반하여 신학교에 갔을 때는 오후 3시였습니다. 성당에 도착했을 때 저는 성체를 모신 감실 앞에서 완전히 도취된 채 마치 넋이 나간 듯이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저의 차례가 왔을 때 저는 마지막으로 올바르게 고해하고 거룩한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고해실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온 몸이 떨려서 무릎을 꿇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거의 없을 지경이었지요. 그 때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죄인인 저는 전지전능하신 주님 앞에, 그러고 주님을 대신하시는 신부님께 저의 죄를 고백합니다....”
저의 목소리는 매우 떨렸고 계속해서 끊겼기 때문애 저의 고해기도흘 끝마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몇 가지의 죄를 고백했을 때 저의 훌륭하신 고해 신부님께서 다정하게 질문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말해보게, 자네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지? 아마 자네는 아직도 한 가지 죄를 고백히·지 않았지?”(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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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MAP(Ecology Meryem Ana Platform)
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생태적 회심을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