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살리는 일과 심판하는 일>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하실 일을
사람을 살리는 일과 심판하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지옥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지옥을 만들어 놓고 사람을 지옥에 보낸다면
그것은 그분 본성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저도 이 논리에 일부 동의합니다.
하느님이 지옥을 애초부터 만들어놓고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죄하여 지옥에 보낸다면
그런 하느님은 하느님도 아니고 인간의 투사일 뿐입니다.
천국이란 하느님이 계신 곳이니
천국에 드는 것은 하느님 사랑 안에 사는 것인데
이 천국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곧 지옥이고
하느님 사랑을 선택하지 않고 사랑 밖에 머묾이 지옥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 말씀대로 하느님 “아버지는 여태 일하시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도 아버지를 따라 계속해서 일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이 살리시는 일이고,
이 살리시는 일을 주님께서는 멈추지 않고 여태 하십니다.
그럼에도 사람을 살리시는 일은 하느님께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사랑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살려달라고도 하지 않음은 물론
주님께서 살려주겠다고 하셔도 무관심합니다.
우리가 만일 누구를 사랑했는데 내 사랑을 그가 사랑치 않는다면
우리의 사랑은 미움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누구를 살리려고 갖은 애를 썼는데 그가 무관심하면
우리는 그 일을 포기하거나 괘씸한 마음에 그를 단죄를 할 겁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러잖아도 살리는 일보다 단죄하는 일이 훨씬 쉬운 것이 우리인데,
그렇기에 있는 힘 다하여 안간힘을 써서 살리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무시해버리니 우리는 쉽게 단죄에 빠질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러하기에 하느님도 그러실 거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는 말합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살리시는 당신의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단죄하지 않고 여태 그 일을 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사랑치 않고 그 사랑 안에 머물지 않음으로
우리 스스로 단죄에 빠져들고 지옥을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여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려고 하는 한
주님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기에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실 수 없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