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는 참 가증스런 죄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리처럼 죄인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하지만
제가 실제로 불쌍한 사람이 되거나
사람들이 저를 불쌍히 여기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싫습니다.
그나마 이것은 전보다 나아진 것입니다.
전에는 이보다 더 중증의 죄인이었습니다.
전에는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주님께 청하는 것도 싫었으니 말입니다.
지금은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하지만
옛날 미사 경문은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였지요.
저는 그 부분이 그렇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기도할 때마다 “내가 왜 불쌍해?”하고 반감이 들었습니다.
저의 불쌍한 처지를 마음으로부터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교만하게 주님 앞에서도 저의 불쌍함을 인정키 싫었던 제가
그래도 이제는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주시라고 기도할 때,
마음에서 거슬러 올라오는 것은 없고 오히려 마음 차분히 가라앉으며
고개가 꼿꼿한 바리사이와는 달리 고개도 자연스럽게 숙여집니다.
여전히 불쌍한 것은 싫지만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불쌍한 것이 싫다함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불쌍한 것은 싫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죄의 불쌍함이 아닌 처지의 불쌍함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중풍 병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중풍에 걸려 누워 지내게 되는 것이 제일 두렵습니다.
정신은 말짱한데 내 수족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빨리 죽지도 못하고 오랫동안 그렇게 누워 지내야 한다면 끔찍할 겁니다.
숫제 치매에 걸려 아무 것도 모르면 오히려 나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런 저의 처지를 겸손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진장 비관할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불쌍한 처지가 되는 것을 싫어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가 되거나 신세를 지는 사람이 되는 것 때문입니다.
자존심 때문인 거지요.
하느님한테는 무릎을 꿇지만 사람에게는 무릎 꿇기 싫은 겁니다.
하느님한테는 청하지만 사람에게는 아쉬운 소리 하기 싫은 겁니다.
하느님은 의지하지만 사람에게 의존하는 사람은 되기 싫은 것입니다.
지금 저의 큰 과제는 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가 진정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래야 제가 아름다운 늘그막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저의 어머니를 보면서 참으로 요즘 깊게 생각합니다.
1년 넘게 누워계시는 저의 어머니는 지금 매우 괴로워하십니다.
자식들한테 폐 끼치는 것을 그렇게 괴로워하시며
왜 빨리 하느님께서 데려가지 않으시는지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며칠 전 전화를 드릴 때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기꺼이 잘 모시지 못하는 저희 자식들 잘못인 것도 같고,
자식들에게마저 너무 자존심이 강하신 저의 어머니 잘못인 것도 같고.
아무튼 이래저래 제가 너무 괴로웠지만
어머니를 보면서 제가 얼마나 더 겸손해져야 하는지,
얼마나 더 저의 불쌍한 처지를 잘 받아들여야 하는지 성찰케도 되었습니다.
주님, 겸손치 못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저의 어머니도 불쌍히 여기시고, 선종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