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나 일반 대중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웃을 사랑할 때 제자답게 좋은 일 하는 적극적인 사랑도 해야겠지만
소극적일지라도 남을 죄짓지 않게 하는 사랑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로서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데
이런 의도와 달리 나도 모르게 남을 죄짓게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남을 죄짓게 하는 겁니다.
부지불식간이란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라는 뜻인데
실제로 우리가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무의식적입니다.
전에 독재 시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운동권 학생들이
동아리 활동을 통해 후배들을 의식화하고 투사로 길러내곤 하였지만
이처럼 의식을 강조하고 의식을 하며 살려고 하더라도 우리를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무의식이라는 것이 현대 심리학의 발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 성찰과 아울러 무의식의 개조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무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고
오랜 기간 형성된 무의식을 개조하기 위해 그것을 또 오래 의식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무의식은 의식의 반복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제가 청원자 양성을 할 때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듯이
남을 죄짓지 않게 하는 양성도 했는데 예를 들어 수도원 들어오기 전에 하던 대로
문을 쾅쾅 닫아 이웃에게 피해 주던 형제를 이제는 그러지 않게 하기 위해
문을 살살 닫는 것을 의식하고 반복하게 하면
나중엔 의식치 않아도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살살 문을 닫게 되지요.
다음으로 주님의 제자라면 형제의 죄를 무한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줘야 한다.”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면 한 번 용서하기도 힘든데
주님의 제자라면 무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한두 번 용서해줬는데도 그 죄가 반복되면 구제 불능이라며 포기합니다.
그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가 사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이 한두 번 용서해주는 정도이고, 더 이상의 사랑을 포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형제가 죄짓거든 꾸짖는 것까지 하라고 합니다.
꾸짖어서라도 죄를 짓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용서해주는 것도 힘든데 꾸짖는 사랑까지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꾸짖을 때 상대가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꾸짖는 것도 힘들지만
꾸짖을 자격이 없는 나라는 것을 알면서 꾸짖는다는 것이 더 힘들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힘들어도 사랑 때문에 욕먹을 각오를 하고 꾸짖어야 하고,
그렇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죄인임을 겸손히 인정하며 꾸짖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답게 사랑하는 것 참 힘듭니다.
그래서 힘드니 그만둘까, 힘들어도 사랑할까 선택해야 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