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여러분,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의 독서는 에페소 신자들이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권고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권고는 실로 엄청난 권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감히 하느님을 본받으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이 권고만 엄청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교가 본래 그렇습니다.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기도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주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잖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시고,
당신뿐 아니라 모든 인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하신 것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신분을 격상시키는 너무나도 설레는 가르침이었지만
당시 교도권자들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너무도 충격적인 가르침이었고
결국은 주님을 신성 모독죄로 죽임당하게 만든 가르침이었지요.
그런데 사실 종교들의 가르침은 대개 이렇습니다.
동학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부처가 되라는 뜻으로 성불하라고 하며,
도교에서는 신선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짐승이 되는 것과 하느님이 되는 것 사이의 존재이고,
위대한 종교들은 다 하느님처럼 되라고 초대하고 도전하는데
이런 초대와 도전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답게
하느님을 본받으라고 하면서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니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사랑 안에 사는 것이 당연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사랑받은 것이 분명하다면,
사랑하며 사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본받는 것은, 아담과 하와처럼 신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놓으신 그리스도처럼
서로 자비롭게 대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처럼 되는 것을 선택한 사람은
이제 짐승처럼 욕망에 자신을 구겨 넣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얘기합니다.
“불륜을 저지르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에서 받을 몫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느님처럼 되는 것과 짐승처럼 되는 것 사이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어둠의 자식일 수는 없고,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사랑이 아닌 욕망의 노예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 덕분에
바자회가 잘 끝났습니다.
하느님께는 감사와 찬미를,
여러분에게는 감사와 존경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