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은 환멸의 과정입니다.
잘 모를 때에는 어떤 한 사람이 꽤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알아갈수록 그의 추잡하고 추악함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사람을 많이 겪어본 사람,
사람에 대해서 많이 안다는 사람,
그래서 도사연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고 얘기하고
사람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저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말라고.
그러면 당연히 실망하게 되고
자기의 실망 때문에 공연히 그를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제법 그럴 듯하게 충고를 합니다.
이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틀렸습니다.
사람을 더 깊이 알면 사람이 곧 하느님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는 사람을 알면 알수록 환멸을 느끼게 되지만,
어디서부터는 사람을 알면 알수록 사람이 곧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수운 최 제우 선생은 人乃天이라고 하였고,
부처님은 梵我一如라고 하였으며,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 곧 당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하느님처럼 좋은 사람이어서
하느님처럼 나를 만족시키는 사람이기를 바란다면,
그때 그는 하느님이 아니고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처럼 그를 사랑할 때
그는 곧 하느님입니다.
어제는 수도원에서도 하루 종일 일본 지진 피해 얘기를 했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재앙을 당한 것에 대해
일본이 나쁜 짓을 많이 하여 벌을 받았다고 하는 형제들이 없었습니다.
역시 수도자들, 그것도 프란치스코의 제자들다웠습니다.
다들 너무도 안타까워했고,
일본이 해일을 막아줬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일본 덕을 봤다고 했고,
조난자를 구하기 위해 헬기 100대를 빨리 보내지 않고 뭐하냐고 하며
우리 정부의 미흡한 구조 노력을 질타하는 형제도 있었습니다.
일본이 과거에 한 추악한 짓을 보면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이때만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봤던 것입니다.
하늘을 보며 구름도 봅니다.
구름을 보며 하늘도 봅니다.
그러나 구름만 보는 사람은 하늘을 보지 못합니다.
구름만 보고 참 하늘이 어둡다고 얘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보는 사람은 반드시 하늘의 구름들도 보고,
하늘을 이루는 구름들을 봅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사랑, 그것도 하느님 사랑에 가까운 사랑일수록
사람을 하느님의 작은 신들로 보게 합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눈이 헷가닥 가게 만듭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그 사람은 화장실도 안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그 사람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한갓 인간임에 실망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 실망에서부터 점프하여 하느님 사랑으로 올라가면
이제 다시,
아니 이제 비로소 완전하게 인간이 하느님의 작은 신들임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작은 신들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나도 비로소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됩니다.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은 환멸의 과정입니다.
잘 모를 때에는 어떤 한 사람이 꽤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알아갈수록 그의 추잡하고 추악함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사람을 많이 겪어본 사람,
사람에 대해서 많이 안다는 사람,
그래서 도사연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고 얘기하고
사람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저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말라고.
그러면 당연히 실망하게 되고
자기의 실망 때문에 공연히 그를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제법 그럴 듯하게 충고를 합니다.
이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틀렸습니다.
사람을 더 깊이 알면 사람이 곧 하느님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는 사람을 알면 알수록 환멸을 느끼게 되지만,
어디서부터는 사람을 알면 알수록 사람이 곧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수운 최 제우 선생은 人乃天이라고 하였고,
부처님은 梵我一如라고 하였으며,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 곧 당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하느님처럼 좋은 사람이어서
하느님처럼 나를 만족시키는 사람이기를 바란다면,
그때 그는 하느님이 아니고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처럼 그를 사랑할 때
그는 곧 하느님입니다.
어제는 수도원에서도 하루 종일 일본 지진 피해 얘기를 했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재앙을 당한 것에 대해
일본이 나쁜 짓을 많이 하여 벌을 받았다고 하는 형제들이 없었습니다.
역시 수도자들, 그것도 프란치스코의 제자들다웠습니다.
다들 너무도 안타까워했고,
일본이 해일을 막아줬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일본 덕을 봤다고 했고,
조난자를 구하기 위해 헬기 100대를 빨리 보내지 않고 뭐하냐고 하며
우리 정부의 미흡한 구조 노력을 질타하는 형제도 있었습니다.
일본이 과거에 한 추악한 짓을 보면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이때만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봤던 것입니다.
하늘을 보며 구름도 봅니다.
구름을 보며 하늘도 봅니다.
그러나 구름만 보는 사람은 하늘을 보지 못합니다.
구름만 보고 참 하늘이 어둡다고 얘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보는 사람은 반드시 하늘의 구름들도 보고,
하늘을 이루는 구름들을 봅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사랑, 그것도 하느님 사랑에 가까운 사랑일수록
사람을 하느님의 작은 신들로 보게 합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눈이 헷가닥 가게 만듭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그 사람은 화장실도 안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그 사람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한갓 인간임에 실망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 실망에서부터 점프하여 하느님 사랑으로 올라가면
이제 다시,
아니 이제 비로소 완전하게 인간이 하느님의 작은 신들임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작은 신들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나도 비로소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됩니다.
내가 만약 그 상황이었더라면...
나는 나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것인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주님께 부디 희생자들에게는 평화의 안식을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당신의 위로를 청해봅니다.
이웃일본에서 무섭고 처첨하게 닦아왔읍니다
어린아이가 엄마품에 안겨 헌난한 모습을
두리두리 보는데 울컷 눈물이 쏟아졌읍니다
그 순간 난 그 아이의 어미가 되어 가슴을 쓸어낸듯합니다
주님!
참옥한 현실을 슬기로움으로 극복한 힘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