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옛날의 저는 용서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자신만만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제가 용서할 것은 별로 없었고,
청해야 할 용서가 더 많았기 때문인데
문제는 그때는 청해야 할 용서가 많고 또 크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한 짓이 용서받아야 할 짓인데
그런 짓을 하고서도 그런 줄 모르고 살거나
심지어는 용서받아야 할 짓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는 사랑하려고 무척 노력했고 실제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한 것인데
그에게 맞는 사랑이 아니거나 심지어 사랑의 폭력일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옷을 사랑으로 지었지만 그에게 맞지 않는 옷이거나
그가 싫어하는 스타일인데도 입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았지요.
아무튼, 저는 제가 용서해야 할 것보다 용서청해야 할 것이 더 많았는데
더 큰 문제랄까 죄는 제가 하느님의 용서 체험이 없었던 점입니다.
물론 제가 잘못도 많이 하고 죄도 많이 지었지만
그것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저를 단죄하고 자책하는 것으로 그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였을 때
우리야가 아니라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한 다윗처럼
저도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용서를 청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하느님의 용서 체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내리사랑인 것처럼 용서도 내리용서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으로부터 크고 많은 죄를 용서받은 체험이 있을 때
작고 적은 이웃의 죄를 몇 번인지 따지지 않고 용서할 수 있겠지요.
오늘 몇 번을 용서해야 하는지 물은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횟수를 따지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든 비유의 뜻이
바로 이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