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1주 수요일-2018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늘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보고 악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왜 악한 것일까 우리는 당연히 생각게 됩니다.
왜 악한 지에 대해 다른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고,
아주 심오한 차원에서 볼 수도 있지만 오늘은 좀 다른 차원에서 보렵니다.
우리는 악하다고 할 때 보통 악한 행동을 했을 경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결과로서 악을 저지른 경우입니다.
그래서 실수로 악을 저지른 경우 악하다고 하지는 않지요.
죄인 줄 알면서도 남을 괴롭히고,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누구에게 피해를 주거나 누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이 왜 죄이고 왜 악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관점을 좀 달리 하여
선을 보지 못하는 악에 대해서 보려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한없이 널려있는 선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악하다는 겁니다.
꽃이 있는데 왜 가시를 봅니까?
장미꽃의 얘깁니다.
하늘이 있는데 왜 구름을 봅니까?
아니, 하늘은 못 보고 왜 구름만 봅니까?
그것은 내 안에 상처가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내 안에 어둠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그리고 그것은 내 안에 악이 있기 때문이고,
더 심하게 얘기하면 악만 가득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악이 악을 보고,
선이 선을 봅니다.
그러니 자연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내 안의 악은 어떻게 들어온 걸까?
아담과 하와처럼 뱀이 밀어 넣은 걸까?
뱀도 우리 주변에 많지만 욕심이 악을 생산합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못 가진 선만 보기 때문에
가진 선을 못 보는 악이 발생하고,
못 가진 것을 가지려는 악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난하면,
우리의 욕심이 가난하면,
그래서 ‘더’를 바라지 않는다면
지금 가진 선들만으로 감지덕지感之德之하고
하늘에 더 이상 ‘더’를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장미꽃이 하느님이 만드신 하늘의 표징임을 보지 못하여,
하늘을 보면서도 하늘을 내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여
또 다른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늘의 표징을 여전히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도 ‘네가 바뀌라’고, 회개하라고 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