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창조의 길
복음은 행동이 수반된 언어입니다.
행동하는 자비가 없는 설교나 우리 자신이 기쁜 소식이 되지 않는다면,
기쁜 소식이라고 설교해도 듣는 이에게는 부질없는 말로 들릴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나에게서 나를 해방하는 종교입니다.
내가 운전대를 잡고 걸어왔던 길에서 교통사고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위한 종교입니다. 내 안에 있는 깊은 상처와
자신의 죄가 낳은 관계의 균열에 대한 정직한 인식 없이는
숨겨둔 증오심과 자신의 범죄를 타인에게 전가하고 의심할 뿐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너를 대할 때, 깨끗한 마음, 정직한 마음 없이 출발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이 실천적 언어라면 창조적 행위가 되는 선은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는 기쁨으로 단절되었던 관계를 연결로 돌려놓습니다.
연결은 타인의 통제를 멈추고 관계의 균열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덮어두고 미루다가 세월만 낭비하기 쉽습니다.
무엇보다 내면의 진실을 대면하고 당사자와 대면해서 풀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기도와 희생을 봉헌한다 해도 대면 없는 기도는 허구로 끝나고 맙니다.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이,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사도 5,29)
베드로 사도가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 예수님, 사도 바울로는 당시 종교 당국에 불복종했습니다.
나는 우리의 교사들과 사목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거나 간과해 왔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정치 권력을 가지고 지배했을 땐,
종교적 권위에 불복종하는 사람들을 이단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단은 불복종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사랑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교회에 충성하느라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집단 바깥의 존재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대신
집단에 대한 충성이 그리스도인들의 미덕이 되어가는 현상은 슬픈 일입니다.
자연 안에서 창조의 아름다움을 찾는 이들과
가장자리와 밑바닥 사람들의 견해와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들과 관계를 넓히는 일은 각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들을 넓히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자유를 헤치지 않습니다.
통제를 멈추는 사랑, 용서 청하고 용서하는 사랑, 허용하고 놓아주는 사랑이 사람을 살립니다.
받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사랑, 보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받아야 내려갈 수 있으며, 아버지의 품을 느껴야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칸 가난은 극복해야 할 유산이며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결단하는 자의 유산입니다.
강요된 가난은 힘이 없습니다. 강요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쁨에 찬 가난이야말로 우리의 보물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쁨 속에서 가난과 겸손으로 회심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자비와 선으로 관계를 새롭게 하는 창조성은
싸우거나 도피하지 않고, 경쟁하거나 비교하지 않으며, 증명하거나 자랑하지 않아도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즉흥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자비와 선은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흘러나와 나를 통하여 너에게 흘러갑니다.
창조가 이루어지는 관계는 아름답습니다.
나를 창조의 도구로 선택하신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너에게 자비와 선을 행하시도록
내 자유를 내어드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낙원을 발견하는 놀라운 기쁨을 거기에 두셨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