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는 겨자씨 비유를 묵상하다
이번에는 “어떤 사람”에 대해 눈길을 모았습니다.
겨자씨를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는 “어떤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란 참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그 “어떤 사람”은 작은 것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교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큰 것만을 지향하기에 작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교만한 사람과 달리
그 “어떤 사람”은 작은 것도 볼 줄 아는 참 관상의 능력자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는 제가 경험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시력이 떨어지니
큰 것은 그래도 좀 보는데 작은 것은 거의 못 본다는 겁니다.
영적인 시력도 이와 마찬가지가지로
교만할수록 영적인 시력은 떨어지고
겸손할수록 영적인 시력은 좋아집니다.
그 “어떤 사람”은 반대로 작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큰 것은 쉽게 우리를 허영에 빠지게 하는데 비해
작은 것은 우리를 진실하게 하기에 작은 것을 사랑합니다.
허영虛榮이란 말에는 빌 허虛자가 들어갑니다.
실實하지 않은 거고 거품이 낀 것이며,
실제보다 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높은 굽의 신을 신는 것과 같이
작은 진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기에 실제보다 과장을 하는 거겠지요.
그러므로 작은 것을 사랑하는 것은
허영을 혐오하고 진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은 작은 것에서 가능성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주 작게 시작하여 큰 것을 이룬 사람을 대단하다고 하는데
그 “어떤 사람”은 작은 것의 외양을 보지 않고
작은 것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는 것입니다.
사실 외양만을 보는 사람은 씨앗을 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는 사람이 씨앗을 심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사람”은 작은 것의 외양만 보지 않고
그 안에 있는 무한을 볼 줄 아는 사람인데,
그러나 그것은 “네 시작은 미미하나 끝이 창대하다”와 같이
그런 거대주의를 지향하는 욕심의 아류가 아닙니다.
무한하신 하느님, 바로 그 분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 소유의 커짐을 보지 않고 하느님을 보는 것,
작은 것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볼 줄 알고 믿는 것,
이것이 참 관상이고 영적인 관상이 아닐까요?
내 자신 되기를 ,허공치는 삶 태워지고 영원함으로
일상 생활의 영성을 기억하고 실행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