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하소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남은 자?
남은 자란 무슨 뜻인가?
뽑히고 남은 자들인가?
그렇다면 뽑는 사람은 누구이고 누가 뽑히는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유력자들이 뽑고 유력자들이 또한 뽑히겠지?
제일 유력자들이 제일 유력자들을 뽑고,
그 다음 유력자들이 그 다음 유력자들을 뽑고,
또 그렇게 뽑고 뽑히고 난 다음 남은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고 오늘 복음의 바르톨로메오이겠지.
이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들은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소리를 쳐야 한다.
바르톨로메오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한다.
그러나 소리를 질러도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잠깐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내 유력자에게 온통 쏠리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 둔 지금,
대통령 후보는 일거수일투족이 다 관심의 대상이고,
그들의 말은 별 것 아닌데도 일일이 다 알려지고
직접 얘기하지 않고 대변인을 통해 얘기해도 크게 기사화한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는 크레인이나 철탑에 올라가 얘기해야
겨우 사람들이 쳐다보지만 그들의 말은 아무런 반향이 없고
호수에 퐁당 잠겨버린 돌처럼 이내 잠잠해진다.
유력자들은 이들의 소리를 귀찮다고 무시하고
보통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니기에 무관심하다.
그래서 불쌍하다.
보지 못해서 불쌍한 것이 아니고,
보다가 못 보게 되어서 더 불쌍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실은 안 불쌍하다.
그것은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불쌍한 처지를 아는 자는 사실 불쌍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하다.
조금 본다고 자신의 진짜 불쌍함을 모르는 자보다 오히려 행복하다.
그런데 안 불쌍한 진짜 이유는 이것이 아니다.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면서도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용기는?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불쌍함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이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기죽지 않는 용기이며
주님과의 관계에서는 주님께 다가가는 용기이다.
그렇다.
자신의 불쌍함을 인정하고 숨기지 않는 사람만 주님께 나아가고
인간의 만류를 개의치 않는 사람만 주님께 나아가는데
주님께 나아가고 다가가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용기이기도 하지만 믿음이다.
내가 용기 있어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믿기에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믿게 하기에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가는 모습 그의처지 더러운 겉옷 자기신세 한탄 뚫고 용기있는 그 믿음
저에게도 그 믿음으로 용기있게 살아가게 하소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느끼는 그 순간을 위해,
저는 오늘도 저를 내려 놓고자 좋은 습관하나를 취하고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