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 예레미아서는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하고,
에페소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하고,
화답송은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정 나의 정의이고 평화이며 목자이신지,
나는 세상에 대해 주님의 정의이고 평화이며 목자인지 성찰케 되는데
역시 저는 부끄럽고 반성할 점이 많습니다.
우선 주님이 우리의 정의이고 평화이며 목자이신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주님이 그런 분임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주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진정 내게 그러한 분이신가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정의이기보다는 제가 종종 세상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의 정의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의한 사람으로 몰았을까요?
다행이도 저는 본당 신부를 별로 해본 적이 없지만 제가 본당 신부였다면
얼마나 많은 주님의 양들을 저의 정의로 못살게 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라고 얘기하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주님의 정의로 세상을 다스렸다면
주님의 양 떼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않았을 것이고,
주님께서 그렇게 가엾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에도 제가 여러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주님의 정의는 우리의 정의와 달리 사랑의 정의입니다.
사실 정의의 근본이 사랑이고 정의의 완성이 사랑이지요.
주님은 모두를 공정하게 사랑하기에 내 맘에 드는 사람에게는 잘해주고,
내 편이 아닌 사람에게는 불의한 그런 정의가 아니라 모두에게 정의롭고,
그래서 세상이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하는 정의였으며.
그래서 주님은 세상의 평화이시고 우리의 평화이셨지요.
그러나 이런 주님을 목자로 모시는 우리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산업화를 위한 독재를 하였을 때
그래서 저도 민주화 운동에 조금 발을 담고 불의에 대항하여
당시 민주화 인사들과 같이 싸운 적이 있는데 저는
그분들과의 관계에서 내적 갈등이 없지 않았습니다.
인사들 중에는 성직자들도 많이 있었고
독선적인 정의를 가진 분들이 있었고,
그래서 그분들은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기보다는
불의의 고발에만 치우치는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는 싸움의 동력이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 아닌
불의한 자들에 대한 적개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의 불의를 고발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잘못을 자주 범하는 것입니다.
진정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어렵고 평화를 이룩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든든히 바탕을 두지 않은 사랑으로는
사회 정의와 평화는 물론 자기 평화와 정의를 이루는 것도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쉽게 좌절할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더욱 주님을 붙들어야 할 것이고,
우리의 정의와 평화와 목자로 모셔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