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위에 인용한 구절은 사람이 죄를 지은 다음
하느님의 추궁에 대한 사람의 답변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은 다음 사람이 한 짓이지요.
죄지은 다음 우리 인간이 하는 짓이 이 두 가지,
곧 숨는 것과 핑계를 대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에 대해 이것은 그래도 약과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심지어 오리발을 내미는 사람도 있으니 말입니다.
숨는 것과 핑계 대는 것은 그래도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이지만
오리발 내미는 것은 죄를 짓고도 안 지었다고 잡아떼는 것이니
실로 더 나쁘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오리발 내미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리발 내미는 것은 자기 죄를 부정하는 것이지만 숨는 것과 핑계 대는
것은 바로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고 자기 주체성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를 짓고도 안 지었다고 뻔뻔한 것보다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이
죄의 질도 낫고 다음에 또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이 더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자기를 부정하고 주체성을 잃는 것이 그만큼 나쁘다는 뜻입니다.
먼저 숨는 자기 부정의 문제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자기 부정이란 이런 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죄지은 내가 현재의 나인데 그런 나는 나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이고,
이런 나를 사람들 눈에서 감추거나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부정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 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 괴로울 뿐 아니라
행위할 주체도 없게 되는 것이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관계 맺을 주체도 없게 되는 것이니 관계가 단절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숨는 것은 인간 관계만 단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볼 수 있듯이 하느님과의 관계도 단절되거나
단절되지 않더라도 하느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사람들 눈에서 없어짐으로 자신을 감출 수 있지만
하느님의 눈에서는 내가 없어질 수 없고 자신을 감출 수 없지요.
시편 138편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다음으로 핑계를 댐으로써 주체성을 잃는 문제를 보겠습니다.
핑계란 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 때문에 죄를 짓고,
너 때문에 사랑할 수 없고,
너 때문에 불행하다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내 주체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나의 행불행이 나의 손에 있지 않고 그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인생을 잘사는 지혜로운 사람은 <네 덕, 내 탓!>이라고 합니다.
혹시 '네 탓이요, 네 탓이요, 네 큰 탓이로다!'하며
살지 않는지 돌아보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하느님 사랑에 물줄기를 대고)
http://www.ofmkorea.org/318318
19년 연중 제5주간 토요일
(핑계, 자유를 포기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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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체험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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