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올 부활절 이후 저는 자주 예수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다는 것을,
뒤집어 얘기하면 예수가 죽지 않으면 그리스는 부활하실 수 없다는 것을
자주 묵상하게 되었고 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나를 봤으면 나를 보내신 분을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살아 함께 계실 때에는
예수님을 보고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에 실패했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을 보는 것에도 실패했지요.
그리고 예수가 죽고 인간 예수에 대한 미련이나 애착이 없어지고 난 뒤에야
예수에게 고착되었던 눈을 돌려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되었던 겁니다.
예수가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가리는 우상이었던 셈입니다.
개신교가 예수님의 모습이 있는 십자고상도 우상이라고 하며
예수님이 없는 십자가만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런데 우리 가톨릭에서는 그렇게 생각지 않지요.
십자고상이 수난과 부활의 그리스도를 관상케 한다는,
보이는 것이 다 그리고 꼭 우상은 아니라는 입장이지요.
밖의 사물이 문제가 아니라 안의 눈이 문제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예쁜 여자가 하느님 관상을 방해하는 우상이 아니라
예쁜 여자에 홀려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욕망의 눈이 문제지요.
제가 자주 하는 예가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우리가
아름다우신 하느님을 보는데 실패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아름다운 자연이 우상이 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사람의 경우나 돈의 경우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데
그것은 악하거나 예쁜 사람의 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욕망과 욕심으로 보는 눈이 문제이고
내 안에 욕망과 욕심이 있을 때 그것들이 하느님을 가리는 우상이 되지요.
그러나 세상 욕망이 내 안에서 비어지고 교만도 부서져 우리가
믿음과 성령의 눈을 가지게 되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볼 수 있고,
형제 안에서 얼마든지 하느님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헐벗은 사람이 곧 당신이라는 말씀처럼 형제가 곧 주님임을 볼 수 있지요.
지금 저는 영보 연수회를 위해 산청 성심원에 와있는데
어제는 아침 일찍 경호강을 따라서 뛰었습니다.
흐르는 물을 보면서 물이 흐르듯 모든 것은 흘러간다는 것을 묵상하며,
그러니 사람이든 건강이든 흘러가는 것을 붙잡으려들지 말아야 한다는
묵상을 하며 처음엔 뛰었는데 계속 뛰면서는 이 물이 어디서 나와
여기까지 흘러 왔는지 그러니까 수원지에 대해 묵상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서까지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정 반대인 걸로만 사람들이 알고 있고
우리 교회는 진화론을 부정하는 거로만 알고 있는데
우리 교회가 진화론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 교회가 반대하는 것은 무신론적인 진화론이고,
우리 교회는 창조론적인 진화론을 얘기하고 있지요.
무신론적인 진화론은 있는 것의 근원이나 근원의 근원을 따지지 않고
이미 있는 것에서부터 어떻게 진화되었는지 그것만을 따지지만
창조적 진화론은 있는 모든 것은 그 근원이 창조주 하느님이시고,
창조된 모든 것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오늘까지 온 거라고 얘기하지요.
그러므로 있는 모든 것은 부모를 통해 생겨났을지라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이 세상에 보내시어 있는 것이며,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얘기하듯 형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형제이고,
복음에서 주님 말씀하시듯 예수님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지요.
있는 모든 것은 저절로 그리고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보내주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임을 관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