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지주일과 수난주일이 합쳐진 주일입니다.
풀어서 얘기하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성대하게 입성하신 것과
예루살렘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신 것을 함께 기념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정 반대되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기념하는 것인데
요즘 사람들이 웃기면서 슬프다는 뜻의 <웃픈>과 같은 맥락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주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환영하는데 ‘호산나’라는 말의 뜻이
‘구원하소서!’라는 뜻이고 그러기에 이 환호는 주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환호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심이 분명하고,
그러므로 그분의 오심을 환영하고 환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무엇인지가 사람에 따라 사뭇 다르고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구원과 주님께서 생각한 구원이 사뭇 다릅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구출의 성격이 크고,
구출이라는 것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서
가난으로 인한 고통,
질병으로 인한 고통,
억압으로 인한 고통
온갖 관계적인 고통,
심리적인 고통과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생각하신 구원은 이런 것과 어떻게 다른 걸까요?
주님께서는 이런 구원은 도무지 생각지 않으신 걸까요?
주님께서 온갖 질병을 치유해주시고,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을 구해주시고,
원수관계를 극복하는 법을 알려주심으로 고통에서 구출해주신 얘기가
복음에 숱하게 나오는데 고통으로부터의 구출을 도외시했다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이런 구원을 도외시하신 것은 물론 아니고
그래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크게 환호한 것도
기적을 숱하게 봤고 로마의 억압에서 구해줄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구원이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생각하신 구원은 아닙니다.
만일 이런 구원이 궁극적인 구원이라면 주님도 구원에 실패하셨고,
가톨릭은 불교보다도 구원에 있어서 뒤떨어진 종교입니다.
불교는 마음의 고통과 마음의 평화에 있어서 확실히 답을 주지 않습니까?
이에 비해 주님도 그렇고 우리 가톨릭은 오히려 수난을 얘기하고 있고
오늘 수난주일을 지내듯이 수난, 곧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을 중시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껴안으라고 얘기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우리를 고통에서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광야의 고통을 거쳐 가나안 복지에 도달하듯
고통과 죽음을 넘어 부활의 행복에로 가는 것, 곧 파스카의 구원이고,
이렇게 부활의 행복에로 인도해주실 주 하느님을 만나는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고통은 곧 불행이라는 등식을 깨고,
오히려 고통은 행복에로 가는 징검다리이고,
하느님 나라, 곧 천국에 오르게 하는 사다리이며,
거기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다리라고 가르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지내는 수난 성지 주일의 가르침도 당연히
당시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이 세상 모든 고통에서 구해주실 분으로 맞아들이지 않고
우리를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여 하느님을 만나게 하실 분이요,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과 행복에로 인도하실 분으로
주님을 환영하고 환호하라고 가르치는 주일임을 명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