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호세아 예언자가 주님을 알자고 한 것은 모르니까 알자고 한 것이고,
알도록 힘쓰자는 것도 모르는데도 알려하지 않으니 이제는 힘쓰자는 거지요.
그런데 사실 이런 말을 제가 같이 사는 형제로부터 듣게 된다면
그래! 내가 주님을 잘 모르지! 그러니 이제부터 알도록 힘쓰자고 하기보다
내가 왜 주님을 모른다고 하는 거야! 하고 기분나빠하기 십상입니다.
사실 모른다는 것을 알고,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알려고 할 텐데
안다고 생각하니까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며,
부끄러움이 없으니까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처럼 자랑을 하겠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보실 때 당신을 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다한들 아는 것만큼 아는 것일 뿐 하느님을 전부 안 것이 아니고,
그러기에 언제나 하느님은 자기가 아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하느님은 내가 다 알지 못하고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도 알아야 하지요.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기도하러 성전에 갔다고 하고 하느님 앞에서 감사를 드리는데
이 바리사이는 하느님을 알고 있고,
그는 하느님께 나아간 것이며, 그가 한 기도는 정말 기도였을까요?
반면 세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지도 못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며
그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라고 하는데
이렇게 주눅 들어 있는 것을 하느님께서 좋아하실까요?
우선 바리사이에 대해서 보면
그는 하느님께서 뭣을 좋아하시는지 잘 모르고 있으며
그가 하느님께 나아간 것, 그거 하느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고,
그가 기도한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대뜸 알 수 있습니다.
단식과 십일조보다 사랑을 더 원하신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고,
하느님 앞에 나아갔지만 실은 사람들 앞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세리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랑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세리가 한 것은 정말 칭찬받을 만큼 잘한 것인가요?
앞서 봤듯이 어떻게 보면 잔뜩 주눅 들어 있는 것 같은데
하느님께서도 자긍심을 가지는 것을 원치 않으실까요?
제가 어렸을 때 아비 없고 가난하여 기죽어 있었고 그래서 길을 갈 때
고개를 푹 숙이고 가는데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리는 거였습니다.
지나가시던 저의 큰 아버지가 그런 저를 보시고 혀를 차신 겁니다.
하느님도 그러실 겁니다.
당신이 만드신 인간이 나는 왜 이 모양이지 하며 자신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창조 후 좋다하신 당신의 창조를 못마땅해 하는 거기에 좋아하실 리 없지요.
더욱이 그 주눅 들어 있음이 열등감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욱 좋지 않지요.
사실 바리사이의 우월감도 나쁘지만 세리의 열등감도 나쁜 거지요.
우월감도 열등감도 다 같은 교만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고,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인간끼리 서로 비교하는 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죄와 잘못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고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우쭐대는 뻔뻔함도 문제지만
자기 죄에 억눌려 우울하게 있는 것도 결코 좋은 것일 리 없지요.
죄 안에 갇혀 있는 것이지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음지에 있는 것이지 양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호세아 예언자의 호소대로 하느님을 알도록 힘써
하느님이 은총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리고 우리가 겸손한 사람이라면 젖은 빨래를 햇빛에 말리듯
죄지은 자기를 하느님 자비에 맡길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