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오늘 호세아서를 읽다가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우리말에 입과 관련되어 비야냥이나 비난의 뜻이 담긴 말들이 있습니다.
입만 가지고 왔냐?
입만 살아가지고!
입술로만 찬미하고 입술로만 사랑한다. 등.
그런데 바로 앞의 말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하고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라고 하니 입술이 좋은 것이고,
황소는 안 바치고 입술만 바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얼핏 생각하면 참 염치없고 뻔뻔한 짓 같지만
우리는 이내 압니다.
자기 입술을 바치겠다는 것이 황소를 바치며 으스대는 것보다 더
겸손하게 바칠 것 없는 자신의 가난을 고백하는 것이고,
자신의 가난을 봉헌하는 것이기에 더 좋은 거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래서 즉시 복음의 얘기가 떠오르는데
주님 앞에 두 부류의 사람이 나아옵니다.
하나는 부자와 가난한 과부이고,
다른 하나는 바리사이와 세리입니다.
주님께서는 부자의 많은 봉헌보다 과부의 가난한 봉헌을 높이 치셨고,
자기가 율법도 잘 지키고 봉헌도 많이 한 것 때문에
주님 앞에 와서까지 으스대는 바리사이보다 아무 것도 없이 와서
그저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비를 청하는 세리를 높이 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 황소가 뭐 필요합니까?
황소는 쇠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좋아할까 하느님이 좋아하실 리 없고,
나의 가장 귀중한 것을 바치겠다는 뜻이라면 모를까,
으스대기 위한 황소는 하느님께 아무런 필요도 없고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것을 받아달라고 하였는데
하느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것이 뭘까요?
희생 제사나 번제물이 아니라 자비라고 하셨지만,
다시 말해서 당신에게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이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주님께 봉헌한다면 어떤 봉헌을 주님께서는 제일 좋아하실까요?
제 생각에 겸손을 좋아하시고,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역시 사랑이지요.
우리에게 겸손은 자비를 입게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시기에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게 하는 겸손을 제일 좋아하실 겁니다.
적당한 비교인지 모르지만 엄마를 더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식과의 관계에서 언제가 더 행복했습니까?
엄마의 사랑에 온전히 의지하던 어린아이 때입니까,
엄마 없이도 잘 할 수 있다고 까불기 시작한 때입니까?
돈을 줄 때입니까, 사랑을 줄 때입니까?
모든 것을 줄 때입니까, 아무 것도 줄 수 없을 때입니까?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하다는 겸손의 때
하느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사랑의 때가
아버지의 이름을 가장 거룩히 빛나시게 하는 때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