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오늘 야고보서는 돈 벌 궁리를 하지만 미래 자신이 어떻게 될지
생각지 않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야고보서를 읽으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 미래계획을 세우지만
미래계획들이 어떤 것이고,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생각게 되었고
또 저는 어떤지도 생각게 되었습니다.
미래 대비는 동물들도 하지만 계획까지 하는 것은 인간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미래계획을 세우지만 자포한 사람은 계획을 세우지 않으니
희망을 가지고 현재를 사는 사람만이 계획을 세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서는 돈을 벌 궁리랄까 계획을 세우는 사람을 보고
나무라는 조로 얘기하는데 정말 이것이 나무라야 할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받으려고 하지 않고
아등바등 대는 것이기에 나무라는 것입니까?
물론 하느님께 의탁하는 자세 없는 것은 나무람 들어도 싸고,
오늘 여기서도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 야고보 사도는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 잘 벌고 그런 의미에서 잘 살기 위한 계획은
잘 세우지만 영원의 계획, 생명의 계획이라는 면에서
잘 살기 위한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실 젊었을 때 좋은 일 많이 하고 업적을 많이 세운 것보다
노년을 잘 살아 잘 죽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 생각게 됩니다.
힘 있는 젊을 때는 힘을 어떻게 쓰느냐, 곧
힘을 뺄 때는 빼고 쓸 때 쓰는 것을 잘하면 인생이 성공을 하지만
이제 힘이 별로 없는 노년에는 그 힘없음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나머지 얼마 안 되는 힘을
정말 써야 할 곳 그러니까 생명과 사랑에 이바지하는 쪽으로
쓰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명과 사랑에 이바지하는 삶이란
우리 신앙인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삶이지요.
이것이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유효한 삶이기 때문인데
하느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우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계획을 세우고
하려는 일이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인지 아니지 따지는 것보다
하느님 뜻이 뭔지 먼저 따지고 그걸 하는 것이 더 옳은 자세라는 점입니다.
기도로 치면 ‘주님, 이걸 하려는데 해도 됩니까?’하고 기도하는 것보다
‘주님, 제가 당신 앞에 왔습니다.
뭘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 사도는 중요한 경고도 빼트리지 않습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하느님 뜻에 맞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 것,
이것도 우리가 잘 해야 하겠지만 해야 할 것,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성실히 하는 것,
이것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주님께서 비유하신,
그 달란트의 비유를 연상케 합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미워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보다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인데
미워하지 않는 것보다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하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사랑은 미움이 아니고 관심이라면 관심끊고 싶은 자매에게 사랑의 관심을 더 보내야겠습니다.